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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천 갈래 한 길 - 단색화의 울림’ (실내악단 화음)
서주원 / 2026-06-01 / HIT : 2

공연 리뷰

천 갈래 한 길

- '단색화의 울림'

 

서주원

(음악평론가, 음악학박사)

 

실내악단 화음 토크 콘서트: 단색화의 울림 I: 윤형근, II: 김창렬

2026년 5월 16일, 23일 오후 3시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서울체임버홀 

 

 

  단어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다.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완성된 문장을 무수히 생성해내는 시대에, 단 한 단어 앞에 오래 머문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가든 만사 제쳐놓고 있다. 비평가로서 한 단어, 하나의 문장이란 결국 그렇게 시간을 들여 도착하는 장소다. 세상의 속도와 흐름을 거슬러 단어 하나 앞에 머무는 일. ‘단색화의 울림’은 그런 응시와 응축의 시간을 깊게 품고 있다.

 

 

  '영적 음악과 단색화, 소리와 색이 만나는 자리'

 

  서울체임버홀에서 열린 2026 실내악단 화음 토크 콘서트 ‘단색화의 울림’은 윤형근(5월 16일)과 김창열(5월 23일)의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해설과 대담, 연주가 어우러진 두 차례의 무대였다. 우정아 교수는 작가와 작품 세계를 흥미롭게 풀어냈고, 이어 각각의 프로그램을 구성한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와 임야비(소설가·극작가·총체극단 ‘여집합’ 단장)가 우정아 교수와 짧은 대담을 나누었다. 이후 연주가 이어졌다.

 

  이번 공연의 부제는 ‘영적 음악과 단색화, 소리와 색이 만나는 자리’였다. 단색화와 소리·색의 만남은 비교적 쉽게 읽힌다. 윤형근과 김창열이 단색화로 연결되고, “소리와 색이 만나는 자리”는 그림 화(畫)와 소리 음(音)을 결합한 실내악단 화음의 뜻을 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적 음악’에서 걸린다. 단순히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밀도를 품고 있어서다. 한 번 스쳤다가도 다시 돌아와 곱씹게 만든다. 단어 하나가 거대한 세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오래 바라보게 되는 단색화처럼.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작가를 다룬 두 공연이 두 작곡가와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난다는 점이다. 두 공연 모두 다섯 곡으로 구성됐는데, 아르보 패르트의 작품과 베토벤의 <카바티나>가 공통적으로 포함됐다. 특히 베토벤 현악사중주 13번의 5악장 <카바티나>가 두 공연에 모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단순한 선곡의 우연을 넘어, 단색화가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어떤 정서와 감각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응축된 침묵과 절제된 호흡, 초월을 향한 방향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같은 작품이라도 연결되는 작가와 맥락, 기획자의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른 울림으로 변주된다는 점은 이번 공연의 묘미였다. 미묘하게 나뉜 결들은 끝내 한 길에서 만난다.

 

 

  천지문(天地門), 반복 끝에 열린 세계

 

  방에 들어앉아 그럴듯한 검은 선 하나쯤은 그을 수 있다. 하루쯤은, 일주일쯤은, 어쩌면 일 년까지도. 그러나 수십 년 틀어박혀 반복한다면 어떤가. 게다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변주를 동반한다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 검은 선 뒤편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윤형근은 자신의 작품을 천지문이라고 불렀다. 청색은 하늘이고 다색은 땅의 빛깔이기에 천지(天地)라 했고, 화면의 구도는 문(門)이라 설명했다. 검게 보이는 청다색은 단순한 색면이 아니다. 덧입고 스며드는 반복 끝에 응축된 면이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여러 겹의 색이 서서히 드러난다. 번짐은 멈춘 듯 이어지며 미세한 변주를 이룬다. 극도의 단순함 속에 무수한 층위가 겹쳐 있다.

 

  천지를 그린 윤형근을 주제로 한 공연의 프로그래밍을 맡은 송주호는 무대를 현실 세계와 초월적 세계로 나누어 구성했다. 관객과 가까운 앞 무대는 비교적 밝았고, 뒤편으로 갈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무대 중앙에 머문 빛은 연주자를 위한 스포트라이트라기보다, 천지문처럼 어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가까워 보였다. 연주자들은 곡에 따라 밝은 앞 무대 혹은 어두운 뒤편에 자리했는데, 그 배치 자체가 삶과 초월, 현실과 영원의 경계를 오가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송주호가 선택한 다섯 곡은 윤형근의 삶을 조망하며 하나의 서사처럼 연결됐다. 패르트의 <주여, 평화를 주소서>는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라흐마니노프의 <비극적 삼중주>는 윤형근이 통과했던 지난한 시대와 그에게 씌워진 굴레를 떠올리게 한다. 우미현의 <빛의 유희 II>에 이르면 검은 선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빛의 생명력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카바티나>는 긴 고통 끝에 도달한 고요한 안식처럼 울린다. 마지막에 놓인 펠드먼의 음악은 더 이상 서사적 결론을 향하지 않는다. 송주호는 천지문 너머 펼쳐지는 영원의 세계를 상상하며 이 곡을 선곡했다고 밝혔다. 반복과 정적 속에서 시간의 감각이 흐려지며, 음악은 어느덧 공간 안에 머무는 공기처럼 존재한다. 현실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다른 층위의 시간을 여는 ‘영적 음악’인 것이다.

 

  패르트의 <주여, 평화를 주소서>는 현실의 참사 속 희생자를 위한 기도에서 출발한다. 베토벤의 <카바티나> 역시 단순한 명상적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악보에는 “고통에 짓눌린 듯이”라는 지시어가 등장한다. 숨 막히는 고통의 순간을 지나 음악은 깊고도 초연한 세계에 도달한다. 현실의 고통과 영원의 위로는 맞닿아 있다. 송주호는 <카바티나> 해설과 함께 윤형근의 <다색, 1980>을 나란히 배치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참혹함 속에서 그어내린 검은 기둥들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왼편의 수직 기둥은 쓰러질 듯 연쇄적으로 기울어진 기둥들의 무게를 굳건히 버티고 있다.

 

  기둥은 문으로도 빗장으로도 보인다. 세계를 향해 열리는 문은 폭력적인 세계를 막아내는 빗장이 되기도 한다. 윤형근에게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일은 단순한 조형적 수행이 아니었다. 무겁게 짓눌리면서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세우는 일이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반복한 행위가 하나의 구도가 된 것이다. 하늘과 땅 역시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검은 기둥 사이 열린 공간, 먼 하늘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땅의 색인 다색이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다. 그렇게 열리는 천지문은 현실의 고통 너머 또 다른 시간과 존재의 차원을 묵직하게 드러낸다.

 

 

  천자문(千字文), 골방에서 우주로 

 

  윤형근의 천지문(天地門)이 반복 끝에 열린 세계라면, 김창열의 천자문(千字文)은 물방울 속에 응축된 우주의 문자처럼 보인다. 골방에서 시작된 반복은 끝내 문(門)이 되고 문(文)이 된다. 천지문과 천자문은 다른 듯 닮은 길로 세계를 향해 열린다. 

 

  김창열은 한국전쟁에서 죽음을 스쳤다. 중학교 동창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눈앞에서 폭탄에 사람이 산산이 흩어지는 장면까지 봤다. 전쟁 이후 그의 그림에는 오랫동안 검은 구멍이 등장한다. 푹 파인 검은 흔적들은 전쟁의 상흔이자 존재의 심연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그 함몰의 자리에서 정반대의 이미지를 길어 올린다. 가장 쉽게 흩어지고 사라지는 물방울이다. 투명하게 부풀어 오르는 물방울은, 어쩌면 산산이 흩어진 존재를 다시 붙들어 올리려는 형상처럼 보인다. 그림자는 빛과 이렇게 맞닿는다. 

 

  그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발견한 순간은 낭만적 영감의 장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69년 파리,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다. 그는 세상과 단절돼 있었다. “근 30평이나 되는 마굿간에서 작은 난로 하나를 때는 때라서 난방은 있으나마나 한 거지. 나는 중처럼, 도인처럼 수도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쪼그리고 앉아있곤 했어. 그때 심정은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지. 바로 그 자리에서 물방울이 탄생한 거야.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고통스러울 때 물방울이 튀어나온 거야.” 김창열은 이렇게 회고했다. 

 

  임야비의 프로그래밍은 김창열의 물방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물방울을 “빛의 여집합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빛과 빛의 반사, 빛의 분광, 그림자의 구조로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물방울을 안구와 연결하며, 보는 행위 자체를 또 하나의 감각적 유희로 확장한다. 임야비가 구성한 다섯 곡의 음악은 김창열의 물방울이 품고 있는 사유와 감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춘다.

 

  라벨의 <현악사중주 바장조 중 2악장>은 빛과 물의 유희처럼 유려하게 흔들리고, 배동진의 <Reflective>는 작은 음형과 울림을 극도로 확대해 미세한 표현 하나 안에 응축된 거대한 반향을 불러온다. 패르트의 <알리나를 위하여>에 이르면 침묵과 침묵 사이에 놓인 음은 프리즘처럼 분광되어 투명한 파동으로 번져나간다. 빛이 닿는 자리마다 함께 생겨나는 그림자의 역설은 <카바티나>로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서 완전히 차단된, 어디에서나 골방이었을 베토벤의 음악이다. 임야비는 이 곡의 울림이 “베토벤의 심연을 뚫고 내려가 무한의 우주와 연결된다”라고 표현하며, 1977년 발사된 보이저 2호의 골든 디스크에 수록되어 지금도 우주를 항해하고 있는 음악이라고 설명한다. 끝 모를 고독과 심연을 통과한 음악은 어느 순간 철저한 고립에서 우주를 품은 울림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브람스 <클라리넷 오중주 중 3악장 안단티노>는 몽글몽글 청명하게 흐르는 클라리넷의 선율이 끝없는 고뇌와 사색 끝에 도달한 만년의 브람스 특유의 느긋한 미소 같은 울림을 전한다. 전체적으로 물방울의 투명한 떨림과 생동이 살아 있는 프로그램이다. 누를수록 반동처럼 튀어나오는 생명력이 음악의 반향 속에서 끊임없이 되울린다.

 

  임야비는 김창열의 물방울이 텍스트 위에 얹힌 방식에도 주목하며, 이를 장르를 넘는 “공감각적 유희”로 보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김창열의 작품에는 문자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던 작업은 이후 천자문 위에 물방울이 맺힌 ‘회귀’ 연작으로 이어졌다. 천자문은 물방울을 떠받치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에게 천자문은 유년 시절 세계를 인식하고 질서를 배워가던 기억과 맞닿아 있다. 문자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로 향하는 통로였다. 천 개의 한자뿐 아니라, 첫 두 글자 천지(天地) 안에 이미 온 세계가 응축돼 있다. ‘회귀’ 연작은 가장 오래된 근원으로 되돌아가면서도 끝없이 확장되는 세계처럼 보인다. 천자문 위에 맺힌 물방울은 가장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형상으로 온 우주를 떠받들고 있다.

 

  김창열은 물방울을 발견한 이후 50여 년 동안 물방울만을 그려왔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똑같은 물방울은 없지만 모두 닮아 보인다.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2022)에서 아들 김오안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물방울 하나를 그리는 건 하나의 구상일 수 있다. 그러나 백 개, 천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건 계획이다. 그렇다면 만 개, 십만 개의 물방울을 그리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결국 김창열의 작업은 물방울이라는 소재를 넘어, 가장 쉽게 사라질 것을 끝없이 붙들며 살아가는 어떤 존재의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에필로그 - 오래 잡아끄는 힘

 

  단어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두 공연이 모두 끝난 다음날 아침이었다. 쾌적하고 한산한 일요일 지하철 안에서 문장을 매만지고 있었다. 누군가 한 칸 전체가 울릴 만큼 볼륨을 높인 음악을 들고 들어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여전히 단어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가 바로 옆에 앉아 스피커를 귀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 순간 소리는 통증에 가까워졌다. 붙들고 있는 단어를 놓칠세라 조심스레 일어나 다른 칸으로 향했다. 그가 지금 자신을 피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그대로 지나가자 계속해서 불렀다. 자극의 강도가 점점 더 커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끝까지 단어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비평이란 그런 방식으로 세계에 대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각의 질서가 무너진 사람 앞에서도 끝내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는 것. 폭력적인 소음 앞에서 단어 하나로 버티고, 문장 하나로 저항하는 것. 그것이 무기가 되고 방패가 되어, 마침내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 만사 제쳐놓고 붙들던 단어가 어느 순간 삶의 중심이 되고, 결국 만사가 되는 것.

 

  윤형근과 김창열은 폭압적 세상 한가운데서 검은 선 하나와 물방울 하나를 끝없이 반복했다. 말 대신 무너지지 않는 집념으로 한결같이 생각을 정렬했다. 죽죽 그어진 검은 선과 비슷하게 맺힌 물방울은 천 갈래 결로 흩어지면서도 끝내 한 길로 수렴한다. 그들의 단색화는 세상과 단절된 단독자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시대를 함께 응시하게 한다. 단색화가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세계에 귀 기울이게 한다.

 

  단번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이 시대까지도 왜 어떤 작품 앞에서는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대체할 수 없는 삶을 대가로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