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고전과 창작 사이에서 사유하다
안정순
(음악평론가, 음악학 박사)
현장음악2002: 명상과 성찰의 여정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상연(지휘), 박수현(바이올린)
2026년 4월 29일(수) 오후 7:30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음악적 사유의 현장에 서다
음악은 때때로 너무 쉽게 소비된다. 소음을 지우기 위한 배경이 되거나, 잠시 감정을 환기시키는 감각적 장치로 머문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음악은 종종 멈춤이 아니라 또 다른 속도의 일부가 된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현장음악2002: 명상과 성찰의 여정》은 그 흐름을 단호하게 거슬렀다. 이 공연은 음악을 단순한 청각적 유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연을 통과하게 만드는 하나의 사유로 되돌려놓았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은 언뜻 보면 네 개의 작품이 나란히 놓여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음악은 작품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한 작품의 정서는 다음 작품으로 스며들고, 상처는 침묵으로, 침묵은 성찰로 이어졌다. 그 흐름 속에서 창작곡과 고전곡 역시 대립하지 않고 서로의 의미를 비추었다. ‘현장음악2002’에서 숫자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미술과 음악의 관계를 탐구해 온 화음프로젝트의 시작점을 의미한다. 이번 공연은 지난 20여 년 동안 축적된 질문들을 오늘의 감각 안으로 다시 불러내는 무대에 가까웠다. 새롭게 단장한 화음의 웹진 ‘통로’(Passage)의 이름처럼, 이날의 음악은 시대와 시대를, 상처와 기억을, 음악과 인간을 이어주는 하나의 통로였다.
가장 어두운 질문으로 문을 열다
조은아의 해설에 이어 강준일의 <불의 전사>(화음프로젝트 op. 135)가 첫 곡으로 연주되었다. 이 곡은 강력한 서사를 동반한다.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서승의 초상화(정영창 화백 作)를 바탕으로 하여 외부의 폭력에 의해 파괴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음악으로 환원한다. 원곡은 2대의 비올라와 더블베이스로, 바이올린 없이 저음역 중심으로 쓰였다. 작곡가는 저음역의 악기로 그늘의 세계에서 겪는 그들의 고통, 외침, 투쟁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안성민 편곡의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추가된 바이올린은 화려한 선율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꽃이었고, 피부를 태우는 통증이었고,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바이올린 I, II의 날카로운 상승은 몸에 붙은 화염처럼 번졌고, 비올라는 흔들리는 내면의 독백처럼 그 사이를 배회했다.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피치카토는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음악은 더 이상 선율이 아니라 압박에 가까워졌다.
강준일의 <불의 전사>는 서구의 전사처럼 영웅적 승리를 말하지 않는다. 음악은 서승 교수의 서사를 여러 장면으로 분절해 들려준다. 격렬하게 시작하는 도입부는 한 인간을 집어삼키는 불의 움직임을 묘사한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부터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고, 격렬한 충돌 끝에 음악은 갑자기 힘을 잃은 채 무너진다. 속도는 늦춰지고, 화성은 텅 빈다. 거대한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차갑고 잿빛인 침묵만 남는다. 상처 입은 인간이 겨우 다시 숨을 쉬는 장면에 가깝다.
이 곡은 연주자에게 단순한 정확성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각 섹션에 담긴 상이한 정서와 긴장을 몸으로 체화해야 비로소 작품의 서사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번 연주는 작품이 지닌 강렬한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지만, 섹션마다 변화하는 감정의 결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면 서승의 서사는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음향은 비올라의 불협화음으로 이어진 후, 초월과 영원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아주 미세한 불협적 호흡이 시작된다. 결국 <불의 전사>가 남기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쉽게 봉합되지 않는 기억의 무게다.
시간을 지우는 거대한 숨결
이어진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앞선 질문 위에 천천히 침묵을 덧입혔다. 전위음악의 실험성이 음악계를 뒤덮던 시대에도 바버는 끝내 선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서정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비애를 오래 응시하는 느린 호흡이다.
이번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간감각이었다. 아주 여린 음형으로 시작된 선율은 마디의 경계를 흐리며 천천히 상승했다. 음악은 더 이상 박자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의 거대한 숨처럼 팽창하고 수축했다. 그리고 절정 이후 찾아온 정적. 그 침묵은 단순한 휴지(休止)가 아니었다. 시간 자체가 잠시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바버의 느린 호흡 안에서 시간은 점점 기능을 잃어갔다. 어느 순간 청중은 음악을 듣는다기보다, 그 안에 머물게 되었다. 이날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음악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숨 쉬고 있었다.
<불의 전사>가 던진 역사적 상처를 감정적으로 과장하는 대신, 바버는 그것을 깊은 내면의 침묵 속으로 천천히 침잠시켰다. 명상이란 결국 고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응시하는 일임을, 이 작품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세속의 불꽃에서 영성의 빛으로
이번 공연의 중심에는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이 있었다. 프로그램상 이 작품은 결코 중심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의 개념적 축은 공연의 시작과 끝에 배치된 창작음악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무대에서 청중의 감각을 완전히 사로잡은 순간은 바로 이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기획의 가장 영리하고도 세련된 지점이다.
이날 공연은 고전과 현대를 억지로 균형 맞추지 않은 채 서로를 비추게 만들었다. <불의 전사>가 외부 세계의 폭력과 상처를 응시했다면, <타이스의 명상곡>은 욕망과 정화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내면의 떨림을 들려준다. 원래 이 곡은 오페라의 2막 1장과 2장 사이의 기악 간주곡으로 작곡되었다. 그러나 마스네는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이 간주곡에 담았다. 마치 여주인공의 아리아처럼. 이번 공연에서 박수현 바이올리니스트는 단순한 기악 연주가 아니라, 타이스의 내면을 노래했다.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차갑게 절제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현 위에 머무는 집중력이었다. 활은 한 음에서 다음 음으로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선율의 결을 활끝으로 더듬듯 음 하나하나를 끝까지 응시했고, 그 과정에서 긴장은 결코 풀어지지 않았다. 여린 음에서도 중심은 단단했고, 길게 이어지는 선율은 느슨하게 처지기보다 팽팽한 호흡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 미세한 긴장과 이완의 균형 속에서 선율은 오히려 더 깊은 고백성을 획득했다.
이날 공연의 진짜 클라이맥스는 거대한 음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섬세한 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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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의 소용돌이
공연의 마지막 곡 김신의 <명상 중의 고행자>(화음프로젝트 Op. 200)는 처음부터 무언가 불안정하게 시작한다. 조각처럼 흩어지는 소리들. 건조한 음색. 불규칙한 리듬. 마치 수행자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분망한 생각의 파편 같다. 이후 마림바와 피아노, 하프 등의 타악적 음향이 더해지며 음악은 점점 격렬해진다. 속세의 욕망을 떨쳐내려는 몸부림처럼 들리기도 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불안을 견디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 또한 <불의 전사>와 묘한 대칭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가 외부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다른 하나는 내면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불꽃은 이제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타오른다. 겉은 고요하지만 속은 분망한 생각들로 가득한, 정형화된 시간은 해체되고, 소음과 음향이 얽힌 무중력의 상태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끝내 음악은 비워진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음향은 서서히 걷혀 나가고, 남은 것은 맑고 안정된 호흡뿐이다. 그것은 단순한 평온이 아니라, 혼란과 충돌을 모두 통과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고요다. 이번 공연이 말한 명상 역시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설명을 넘어선 해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분명 현장음악에서 여러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 중 하나가 바로 해설이다. 한국 클래식 공연 문화에서 해설은 여전히 음악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부수적 장치처럼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날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여느 공연과 달리 해설을 공연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음악과 음악 사이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리듬, 또 하나의 서사처럼 기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이 화음이 해설의 위치를 하나의 방식으로 확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화음이 공연마다 해설의 거리와 역할을 끊임없이 조정하며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어떤 공연에서는 해설이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머물고, 또 어떤 공연에서는 이번처럼 공연 내부의 호흡과 정서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형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화음은 ‘21세기 음악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음악회는 여전히 침묵 속에서 완결된 작품만을 숭배하는 공간인가. 아니면 음악과 언어, 설명과 감각, 연주와 사유가 함께 호흡하는 열린 현장인가. 이번 공연은 그 질문에 대해 꽤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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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새로워지고, 창작은 깊어진다
박상연 예술감독이 말한 현장음악, 창작을 고전처럼, 고전을 창작처럼 바라보는 태도는 이번 공연에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 감각으로 구현되었다. 공연의 시작과 끝을 창작음악으로 감싸면서도, 공연의 감정적 정점은 고전 작품인 <타이스의 명상곡>에 내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작품의 서사는 첫 곡인 <불의 전사>와 대조를 이루며 전개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공연은 여러 층위에서 역설적 균형을 이루었다.
창작곡은 더 이상 의무적으로 삽입된 현대음악이 아니었다. 공연 전체의 서사를 설계하는 중심 언어이며, 동시에 고전은 박제된 명곡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감각과 다시 연결되는 살아 있는 음악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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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가 된 공연
앙코르로 연주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은 공연이 남긴 정서를 조용히 되새기게 했다. 비극과 위로가 교차하는 이 음악은 상처와 성찰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화음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롭게 단장한 플랫폼 ‘통로’는 무성 영화와 라이브 음악의 결합처럼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시도들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현장음악2002》는 음악이 시대의 상처를 직시하는 불꽃이자, 동시에 내면을 정화하는 빛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공연이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여러 질문을 끝까지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음악은 왜 존재하는가. 고전은 왜 지금 다시 연주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여전히 공연장에 모여 함께 음악을 듣는가. 화음은 그 질문에 거창한 이론으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공연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명제가 아니라 경험이다. [畵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