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시간을 다시 듣다
- 문경원·전준호와 화음 프로젝트, 역사와 미래 사이의 울림
노지은
(음악평론가)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X 푸투라서울 지구의 밤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 Day 3
2026. 6. 13. 푸투라서울
미래의 공간에서 다시 울린 시간
어떤 음악은 초연의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 한때의 공연으로 지나간 것 같았던 음악도, 다른 시간과 장소 안에서 울릴 때 전혀 다른 의미를 얻는다.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X 푸투라서울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의 셋째 날을 보며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시간의 축적이었다. 2002년부터 이어져 온 화음 프로젝트, 그 시작점에 놓였던 ‘현장음악’의 정신, 그리고 그동안 쌓여온 창작음악의 시간이 푸투라서울이라는 동시대 미술 공간 안에서 다시 현재가 되는 장면 말이다.
그 장소가 ‘미래’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푸투라서울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과거의 초연에서 출발한 음악은 현재의 무대 위에서 다시 울렸고, 그날 마주한 문경원·전준호의 작품들 역시 역사와 미래, 기억과 예술, 단절과 연결의 감각을 비추고 있었다. 셋째 날의 무대는 창작음악이 과거의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안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현장음악에서 푸투라서울까지
화음 프로젝트의 의미는 단순히 음악과 미술을 결합해왔다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결합이 하나의 이벤트로 소비되지 않고, 오랜 시간 축적되어 왔다는 점이다.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곡, 혹은 음악과 함께 새롭게 읽히는 이미지들은 20여 년 동안 화음의 이름 아래 계속 만들어지고 연주되어 왔다. 이번 페스티벌은 그 방대한 아카이브 가운데 미디어아트와 창작음악의 협업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다시 불러낸 자리였다. 그래서 이 무대는 과거의 작품을 단순히 재연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창작음악이 지나온 시간을 오늘의 감각 속에서 새롭게 듣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푸투라서울이라는 장소는 중요했다. 북촌의 오래된 시간 위에 놓인 이 공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장소 안에서 겹쳐지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익숙한 콘서트홀의 질서와 달리, 푸투라서울의 무대는 공연의 형식에 따라 계속 달라졌다. 영상은 높고 넓은 벽면을 채우거나 분할된 화면 위에 펼쳐졌고, 어떤 작품에서는 소리가 무대 안팎을 오가며 공간의 감각을 넓혔다. 이곳에서 음악은 더 이상 무대 위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술의 공간, 도시의 시간, 관객의 이동과 함께 재배치되었다.
역사와 미래 사이에 남은 이미지
셋째 날에는 문경원과 전준호의 작품이 전면에 놓였다. 무대는 첫날과 같은 방식으로 재배치되어 있었다. 앞선 이틀이 영상과 음악의 동시적 결합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험했다면, 이날은 오히려 두 매체 사이의 시간차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앞선 두 작품은 영상을 먼저 상영한 뒤 음악이 이어지는 방식이었고, 마지막 〈박제〉에서는 음악이 먼저 등장한 뒤 영상과 함께 중간중간 다시 결합되는 방식이었다. 음악과 영상은 한순간에 포개지기보다, 서로 다른 순서와 간격 속에서 만났다. 그 간격은 작품을 곧바로 하나의 의미로 묶기보다, 이미지와 음악을 각각의 시간 속에서 바라보게 했다.
전준호의 〈하이퍼리얼리즘: 형제의 상〉은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을 모티브로 한 짧은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다. 영상 속 두 병정 피규어는 왈츠풍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며 서로를 포옹하는 듯하지만, 끝내 완전히 껴안지 못한다. 그 짧고 단순한 움직임 안에는 한국전쟁과 분단, 이념의 균열, 그리고 끝내 봉합되지 못한 역사적 상처가 응축되어 있었다. 영상이 끝난 뒤 이어진 배동진의 〈back and forth: 형제의 상〉은 그 회전이 남긴 내면의 울림을 다른 시간으로 옮겨 놓았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각자의 선을 따라 나아가며 닿을 듯 닿지 않았고, 클라리넷은 그 사이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숨처럼 들렸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영상과 음악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가 아니었다. 한 감각이 남긴 움직임이 다른 감각 안에서 어떻게 다시 울리는가에 있었다.
문경원과 전준호의 〈세상의 저 편〉은 두 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실사 영상 작업이다. 작품은 종말 직전의 한 예술가와 먼 미래의 여성을 두 화면에 나누어 보여준다. 이정재가 연기한 남성은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을 이어가고, 임수정이 연기한 여성은 감정을 절제한 채 지구의 표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 않지만, 예술을 통해 묘하게 감응한다. 신혁진의 〈El fin del Mundo〉는 이러한 서사를 직접 따라가기보다, 그 정서를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선율로 암시했다. 첼로에서 비올라, 바이올린, 플루트로 이어지는 선율의 이동은 서로 다른 시간의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감각과 닿아 있었다. 영상을 모두 시청한 뒤 울린 음악은 관객 각자가 저마다의 ‘세상의 저 편’을 감각하게 했다.
마지막 작품 〈박제〉는 이날의 세 작품 중 가장 복합적인 역사적 층위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자리한 소격동 일대의 역사, 기무사와 병원, 권력과 기억의 흔적이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중첩된다. 임지선의 음악은 영상의 완성본을 보고 뒤따라 붙은 것이 아니라, 일부 장면과 작가의 계획을 바탕으로 상상하며 작곡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 음악은 아직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빈칸을 먼저 더듬은 기억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특히 금지곡이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분해된 흔적으로 음악 곳곳에 숨어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노래는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복도, 물에 잠긴 건물, 군복을 입은 인물들의 움직임 사이에서 흔적으로 남는다.

Visible Sounds, Audible Pictures Day3
단절의 자리에서 남은 울림
셋째 날의 작품들은 모두 단절된 것들을 보여주었다. 껴안을 수 없는 형제,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 못하는 두 사람, 권력의 장소에 박제된 기억, 그리고 금지되었던 노래. 그러나 음악은 그 단절을 단순히 봉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끊어진 자리에서 아직 남아 있는 울림을 들려주었다. 특히 〈박제〉 속 〈동백아가씨〉의 흔적은 이날의 무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때 금지되었던 노래는 완전한 원형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분해되고 흩어진 채 음악 곳곳에 숨어 있다가, 이미지와 공간 사이에서 다시 감지된다. 봉인되었던 노래가 다른 형식으로 풀려나듯, 초연 이후의 창작음악도 푸투라서울이라는 미래의 공간 안에서 새로운 현재를 얻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화음 프로젝트의 역할도 다시 보인다. 화음은 창작음악을 닫힌 악보나 일회적 초연의 사건으로 두지 않았다. 그것을 미술, 공간, 이미지,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질문 속으로 계속 옮겨 놓았다. 이번 푸투라서울 무대는 그 여정이 한 단계 더 확장된 순간처럼 보였다. 과거에 초연된 창작곡들은 단순히 재연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공간 안에서 새롭게 들렸다. 그 음악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간을 넘어, 오늘의 관객 앞에서 새롭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우리만의 리그를 넘어
물론 이러한 시도가 모든 관객에게 곧바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현대음악과 현대미술은 여전히 많은 관객에게 낯설다. 어쩌면 그 낯섦 때문에 더 쉽게 ‘아는 사람들만의 언어’로 닫히기도 한다. 문경원과 전준호가 말한 “우리만의 리그”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래서 이날의 무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중요한 것은 낯섦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낯섦 안으로 관객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이다.
푸투라서울에서의 이번 무대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자, 또 다른 시작이었다. 화음 프로젝트는 과거의 작업을 단순히 꺼내 보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2002년부터 축적되어 온 창작음악의 시간을 오늘의 공간 안에서 새롭게 듣게 했고, 그 음악이 현대미술의 이미지와 만날 때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 실험이 계속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화음의 무대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한국 창작음악의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열어가는 자리로 남기를 기대한다. [畫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