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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畵/音.zine vol.14] 박현의 연주 에세이 - 모티브의 재발견 No. 10: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1번> …
박현 / 2025-06-01 / HIT : 33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중 1, 3악장

 

박현

(바이올리니스트,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단원)

 

 

  체코의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 야나체크(1854-1928)는 비엔나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한 시기를 제외하고 체코 모라바 주 브르노에서 생애 전반을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후기 낭만주의와 차이코프스키 등 러시아 음악과 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1900년대 이후엔 슬라브 민속 선율을 연구하고 작품에 녹여내며 독창적인 자신만의 작곡어법을 만들어냈다. 현악사중주 1번은 1923년 10월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작곡되었다. 아마도 그에게 뚜렷한 음악적 영감과 스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악사중주의 부제 ‘크로이처 소나타’는 작품의 영감이 된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제목으로, 야나체크는 1908년 이미 같은 제목의 피아노 트리오를 작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발표된 피아노 트리오 악보는 남아있지 않지만, 작곡가 자신과 연주자들의 증언을 통해 피아노 트리오의 일부 아이디어가 현악사중주에서 재사용 되었다고 전해진다. 톨스토이가 1890년 발표한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는 아내를 죽인 한 남자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된다. 결혼, 사랑, 욕망의 어두운 면을 다룬 이 소설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는 주인공의 갈등의 시작이 되는 소재로 쓰이는데,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의 긴밀한 결합을 상징하며, 둘의 교감을 질투한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대변하는 모티브가 된다. 야나체크는 이러한 복잡하고 극단적인 심리극을 음악으로 어떻게 풀어냈을까? 

 

  현악사중주의 구조는 전통적 스타일을 따르지 않는 4악장 혹은 4부로 이루어진다. 각 악장의 템포는 머무르지 않고 흐르도록, ‘움직임을 더해’(Con Moto)라는 지시어로 시작한다. 악장의 성격은 큰 대조를 이루지 않고, 순환되는 음정 모티브와 선율로 연결되어 마치 네 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극과 같다. 

 

  1악장의 시작은 제1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유니슨으로 연주하는 느린 두 마디 모티브에 빠른 템포로 화답하는 첼로의 아홉 마디 모티브로 이루어진다. [악보1.]에 나타난 첫 두 마디는 5도 상승했다 4도 하강하는 음정 모티브가 특징적이며, 약음기로 막힌 울림 안에서 크레센도와 강세를 더했다 작아지며 곡의 어두운 분위기를 암시한다. 이어 첼로가 가볍게(leggiero) e단조로 이어가는 선율 역시 상승하는 5도와 하강하는 G-F#-D음이 반복된다. 사분음표와 팔분음표로 이루어진 첼로의 리듬모티브는 종종걸음 혹은 숨이 가뿐 레치타티보(Recitativo) 느낌으로 불안감을 더한다. 말하는 둣한 음악적 표현은 야나체크 작품에서 종종 쓰이는 작곡기법으로 실제 그는 이 테크닉을 ‘말하는 선율(Speech Melody)’라고 지칭했다. 1920년대 오페라 작업을 통해 모라비아 방언의 강세와 특정 감정에 따른 음정 패턴을 개발해 음악에 썼는데, 현악사중주에서도 말을 모방한 모티브들은 단순한 음정 패턴을 넘어 특정 감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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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1. 현악사중주 1악장 1주제, 1-6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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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2. 현악사중주 1악장 2주제, 46-47마디

 

  1주제는 첼로에서 각 바이올린으로 성부를 옮겨 세 번 반복되는데, 음정 모티브는 e단조 조성의 느낌보다는 야나체크 특유의 슬라브 민요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4도와 5도가 중심이 되는 음정 패턴은 모라비아(Moravia) 지방의 민속 선율에서 흔히 쓰이는 음정 구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곡의 흐름은 [악보2.]에 표시된 B장조의 2주제부터 시작되는데, 선율을 받치는 제2바이올린의 삼연음 리듬은 앞서 작곡되었던 피아노 트리오에서 가져온 아이디어의 일부로, 소설 도입에 주인공이 탄 기차 소리와 연관 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이어지는 아르페지오로 이루어진 3주제까지 악장은 총 3개의 새로운 주제들이 활용되고 재현된다. 소나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각 섹션은 매우 짧고 큰 발전을 이루지 않고 급격히 전환되는 에피소드의 나열에 가깝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다가올 드라마를 예고하는 서곡과 같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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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3. 3악장 1주제, 1-4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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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4. 3악장, 8-11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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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5. 베토벤 소나타 9번 ‘크로이처’ 1악장 2주제, 90-97마디

 

 

  현악사중주의 부제인 ‘크로이처 소나타’의 직접적인 음악적 연관은 3악장에 나타난다.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의 격정적인 면을 소재로 삼았지만, 야나체크는 소나타의 숨 가쁘게 흐르는 1주제가 아닌 온음표로 부드럽게 흐르는 2주제를 현악사중주의 ‘크로이처’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베토벤 모티브는 얼핏 들으면 알아차리기 어렵다. [악보3.]의 1주제의 도입에서는 선형이 닮았을 뿐 베토벤 모티브는 단조로 탈바꿈되고, 다른 음정으로 뒤틀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보4.]의 주제가 다시 반복될 때는 [악보5.]의 베토벤 소나타 모티브와 음정관계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율이 펼쳐지는 방식도 특징적이다. 야나체크는 리듬과 주법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음색과 음향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악보3.]에서와 같이 제1바이올린이 시작한 선율의 유니슨을 첼로가 한 박 뒤에 따라 연주하며 짧은 캐논을 만든다. 이 느린 호흡의 주제는 곧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의 32분음표 음들로 어지럽혀진다. 활을 브릿지 바로 위에서 연주하는 폰티첼로(Sul Ponticello)주법으로 소리와 음정은 울림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성을 띈다. 마치 아름다운 멜로디가 주인공의 머릿속 잡념과 죄의식에 의해 단절되는 듯하다. 야나체크는 이러한 새로운 음향 효과들을 통해서도 소설 속 전반에 깔린 어둡고 일그러진 감정들을 표현한다. 이러한 분열된 감정은 악장 중반에 고조되어 [악보6.]의 네 성부는 극단적 대조를 이룬다. 6/4에서 3/4로 변박되는 제1바이올린의 하행하는 선율에 첼로는 짧은 피치카토로 상행음을 연주하고,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는 같은 음을 시간 차를 두어 연주하며 불협의 극치를 보인다. 악장의 종결구는 처음에 나왔던 ‘크로이처’모티브가 재등장하는데, 처음의 잡념은 잦아들고 마지막 두 마디에서 바이올린에 같은 리듬으로 비올라가 느리게 화답하며 허무하게 비극적 결론에 다다른다. [畵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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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6. 3악장, 34-35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