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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8: 눈을 좋아했던 아이
송주호 / 2025-10-01 / HIT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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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좋아했던 아이

 

눈이 내리는 어느 날

초등학생 때였던 초겨울 어느 날. 거실에 앉아있던 나는 첫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집 밖으로 나갔다.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맞으며 집 앞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눈을 받아보려 손을 뻗었지만, 손에 닿은 눈은 이내 녹아버리고 만다. 그래서 두 손을 주머니에 꼭 넣고 담벼락에 쌓인 눈을 살펴본다. 지긋한 눈길은 나도 모르게 노려보는 눈살로 바뀐다. 책에서 봤던 육각형 결정을 보기 위해서. 당시 많은 초등학생이 그랬듯 과학자가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눈이 오면 창문을 바라보며 멍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이렇게 내가 눈을 좋아하는 것은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혹시나 해서 기상청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내 생일에 눈이 내렸다고 적혀 있다. 억측이겠지만, 그래도 뭔가 계시라도 받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41일에 태어난 페루치오 부조니가 자신을 신의 어릿광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겨울 그림

그래서인지 미술관에서도 눈이 내리는 그림을 보면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눈은 언제나 새하얗게 그려져 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그리려고 다 그린 그림에 흰 점을 가득 찍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눈은 항상 무엇인가를 덮어 가리고 있다. 눈 뒤에는 무엇이 감춰져 있을까? 무슨 색이 숨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림은 절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덮은 것이 아닌, 눈 자체가 그것이 되었다. 눈이 내린 그림을 볼 때 평온함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다. 용서받은 것 같은 감흥, 화해한 것 같은 정서.

어느 순간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망각의 영역에 있던 과거가 스멀스멀 떠오르는 느낌. 흰 눈을 표현하기 위해 눈 사이에 어두운색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주름 같은 어두운 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잊었던 그리고 억눌렀던 무엇인가가 고개를 내밀고 나오려고 한다. 오만함과 거만함, 자괴감과 우울감, 울분과 분노, 욕망과 폭력 등. 눈이 하얗기 위해서는 어두운색이 있어야 하듯, 선이 선이기 위해서는 악이 필연적이다. 악도 신의 창조물이라고 말했던 데미안의 글이 떠오른다. 선과 악은 자석의 두 극과 같은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은 한 몸을 지닌다.

백두대간에서의 삶을 그린 그림으로 잘 알려진 황재형의 산을 베고 산을 덮고’(1997~2005)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작은 집이 고립될 정도로 눈이 쌓인 험준한 산자락을 그린 그림이건만, 제목에는 눈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누가 봐도 분명한 눈인걸. 그런데 미술평론가 윤범모는 눈을 보지 않았다. 그는 이 그림에서 산천의 구릉을 보았고, 이를 정신적 주름으로 해석했다. 밝음과 어두움이 켜켜이 쌓여 만든 정신의 주름, 여기에서 우리는 삶을 읽는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잊었던 고향을, 누군가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어머니를 생각할 것 같다.

 

적막한 음악

작곡가 배동진은 이 그림을 보고 겨울의 추위를 생각했다. 그리고 발자국조차 없을 것 같은 적막을 느꼈다. 산줄기들의 중첩에서 느껴지는 원근감도 보았고, 여기서 구릉이 만든 정신적 주름에 공감했다. 그래서 이 그림의 감상을 표현한 현악삼중주곡의 제목은 구릉, 주름이 되어(2017)가 되었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매서운 겨울바람, 흘러내리며 중첩된 능선들, 모두 소리로 바뀌어 있다. 찬 바람을 맞으면 살갗에 돋는 소름처럼 청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현악기의 실낱같은 고음과 무미건조한 소음, 여러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흘러내리며 얽히고설키는 선율들. 그리고 약간의 강약 차이로 가까운 능선과 먼 능선의 원근감도 표현했다.

하지만 이 음악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것은 고막을 뒤흔드는 소리가 아닌 청각을 진정시키는 적막이다. 작곡자는 이 그림에서 얻은 이미지를 흰 오선지 위에 그렸다고 말한다. 첫눈에 들어온 눈의 심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떨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이 그림을 가득 덮고 있는 흰 눈으로 음악을 덮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검은색 음표 대신에 흰 오선지를 그대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구릉처럼 주름진 오선 위에 몇 개의 점을 찍었고, 악기들을 대부분 침묵하게 했다. 그렇게 흰 음악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음악에서 적막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소리 내지 않고 내리는 고요한 눈을 보듯, 소리 내지 않고 연주하는 침묵의 연주자들을 본다. 밝음과 어둠이 한 그림을 이루듯, 선과 악이 한 몸을 이루듯, 소리와 침묵이 하나의 음악이 된다. 그때 비로소 나의 영혼이 들려주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밝은 사람인가, 어두운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소리 내는 사람인가 침묵하는 사람인가? 모두가 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나의 영혼을 찢어 죽이려는 가혹한 폭력이다. 나는 이 둘을 모두 지켜내야 한다. 이렇게 흰 음악은 자학하며 스스로 파멸로 이끌던 영혼을 위기에서 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잠시일 뿐이다. 음악은 곧 멈출테니.

 

더럽게도 하얀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 서점 입구에 적혀 있던 문구였다. 나는 문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한눈에 누구의 글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막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첫 문장, 이제 이 문장은 그의 시그니처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장을 그의 다른 글에서도 본 적이 있다. (2016)의 첫 섹션 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눈송이들이라는 섹션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다.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황재형의 그림에서 눈으로 덮여 잘 보이지 않았던 한 채의 집처럼, 수많은 문장 속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던 그 문장, 작별하지 않는다를 알고 나서야 보인다.

어쩌면 작가도 처음 그 글을 썼을 때보다 5년 후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성글다는 것, 흰 눈, 아래에 있는 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거의 기억. 은 그러한 작가의 서정을 모은 팔레트다.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어 지금도 영향을 끼치는 과거, 그로부터 계속되는 삶의 고통을 흰 눈 덕분에 견뎌왔을지도 모른다. 작가도, 나도, 그리고 당신도. 온갖 채색으로 감정을 강요당하는 피로와 스트레스를 걷어내고, 나의 영혼이 기거하는 마음을 흰 바탕 채로 둔다. 한강의 은 그러한 마음의 이야기다.

하지만 눈이 성글었던 것처럼 흰 바탕은 완전하지 않다. 나도 모르게 어두운색이 주름처럼 끼어있다. 그렇게 둘은 공존한다. 내리는 눈은 더럽게도 하얗고”(눈송이들), 무대에 강한 조명을 비추면 객석은 검은 바다가 된다. (빛의 섬) 그저 부서져 본 적 없는 사람처럼”(백열전구) 한쪽만 강요받으며 영혼 없이 숨 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은 잊고 있었던 온전한 마음을 끄집어낸다.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보지 않으면 나는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 채로 낑낑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달의 흰 앞면만 보지만, 영원히 어두운 뒷면이 함께 해야 온전한 달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언니를 자꾸 생각하나 보다, 흰 강보 안에서 생명과 죽음을 겪은 작가의 언니. “파괴되었으나 끈질기게 재건된 사람.”(작가의 말)

 

다시 듣기

마음에 선과 악,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면, 어차피 착하게 살기는 글러 먹었다. 밝은 표정만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숨겨왔던 어두운 표정도 지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금기를 피하며 작곡을 해오던 작곡가 조은화가 정선아리랑(2019)에서 나의 자연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느끼고, 감정을 절제하여 곡을 쓰던 작곡가 윤한결이 관현악곡 그리움(2024)에서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을 쏟아낸 것처럼, 스스로 강제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그럴 필요 없는 삶을 바라본다. 이제 그림을 보며 밝은색과 어두운색이 함께 보이고,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도 보인다. 음악을 들으며 소리와 함께 침묵이 들리고, 청각과 함께 마음으로 듣게 된다.

이제 배동진의 구릉, 주름이 되어를 다시 들어본다. 침묵 속에 들리는 음들이 눈이 내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리고 음 사이의 침묵들을 타고 구릉이 그려진다. 작곡가의 의도와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짐짓 떠오른 한스 아브라함센의 실내악곡 (2006~08)도 다시 들어본다. 이전에는 이 곡을 들으며 내리는 눈을 상상했지만, 이제는 눈 사이의 성근 공간이 보인다. 흰 바탕의 마음은 그렇게 주름이 지고, 나의 영혼은 다시 오늘을 견뎌낸다.

 

|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