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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6: 슬프게 웃고 우습게 우는 몸, 양가성의 예술
이소연 / 2025-07-01 / HIT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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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 웃고 우습게 우는 몸, 양가성의 예술

 

여기 기괴한 형상의 인간 군상이 있다. 허름한 옷을 걸친 이들은 일그러진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걷는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다가 발을 앞뒤로 비벼대기도 하고, 헐떡대기도 한다. 이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섬뜩하게 웃는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

연극같은 이 춤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로 프랑스의 마기 마랭(Maguy Marin)이 안무한 메이 비(May B, 1981). 섬뜩하고 기이한 동시에 슬프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이다. 웃음과 눈물이 서로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섞여 있을 때 우리는 가장 깊이 인간다움을 느낀다. 이 양가적인 감정의 교차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깊은 매혹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마기 마랭의 메이 비는 바로 이 지점, 인간 존재의 희비극성이 교차하는 언저리에서 출발한다.

 

베케트 극과 메이 비

메이 비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부조리극에 토대를 두고 있다. 말이 끝난 자리에서, 마기 마랭은 무너지고 뒤틀린 몸들을 무대에 세운다. 이들은 병들고 초라하며, 멈춰 있다가 다시 움직인다. 슬픈가 하면 우습고, 우스운가 하면 처연하다.

베케트 극의 인물들은 어떤 서사의 주체라기보다 무의미한 반복 속을 떠도는 존재다.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목적도 이유도 모르며, 종종 말을 중얼거리지만 그 말은 자기를 소진하고 되돌아오는 공명일 뿐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비정상적인 신체성은 고스란히 메이 비의 육체로 전이된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뒤틀린 몸, 무표정과 익살 사이를 오가는 표정의 인물들은 뚜렷한 감정이나 개성을 지우고 존재 그 자체만을 무대 위에 남긴다. 이들은 말 대신 불완전한 걸음, 비틀거림, 동물적인 소리들로 자신의 세계를 말한다. 서사를 잃은 인물들, 의미 없는 반복 속에 갇힌 몸짓들. 이들은 무대 위에 선 아름다운 무용수가 아니라 삶이라는 무대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또 다른 형상이다. 베케트의 인물처럼 마랭의 무용수들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장소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나 목적 없는 삶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전통 연극에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서사 구조를 전개하는 핵심 수단은 바로 언어였다. 그러나 베케트는 언어가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기존의 극작법을 전면적으로 뒤흔드는 혁신적인 언어 체계를 구사한다. 서사구조가 붕괴되고, 인물들의 대화는 서로 이해되지 않으며, 공간과 시간은 불확실하다.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 그의 유명한 이 문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모순을 고백하는 동시에 연극의 언어를 전복시키는 선언이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표현의 한계 속에서도 계속 써 내려가야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임을 알린다.

베케트의 이러한 사유를 마랭은 비연속적 몸짓들을 나열하는 것으로써 해체된 언어를 함축한다. 메이 비에서의 움직임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진행 혹은 의식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이로써 마랭은 관객으로 하여금 해석을 포기하게 만들고, '' 그 자체를 존재의 징후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메이 비를 베케트 극의 인물과 언어가 신체로 치환된 "마법같은 작품"(가디언지, 2024526일자)이라 평가받게하는 이유이며, 오늘날의 무용 공연에서 왜 ''의 예술성이 중심 화두가 되었는지 그 출발선에 서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메이 비는 더욱 의미가 있다.

 

희극과 비극의 공존

메이 비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현전하는 몸, 그것으로써 웃음과 슬픔의 양가적 정서를 조율한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밀치고 쓰러뜨리는가 하면, 엇박자 박수를 치고, 어눌한 춤을 반복한다. 이는 무대를 희극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 웃음은 씁쓸하고 쓸쓸하다.

마랭의 신데렐라(Cendeillon, 1985)에서도 과장되고 희화된 육체가 희비극성을 유발한다. 원래 신데렐라는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쓴 동화에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가 음악을 붙인 발레 작품인데, 마랭은 이를 그로테스크하고 풍자적으로 재창작했다. 무용수들은 큰 눈과 살찐 볼로 표현된 인형의 가면을 쓰고 인형처럼 움직이면서 발레의 전통성을 뒤엎는다. 그로스랜드(Grossland, 1989)는 쁘띠 브르주아 계층의 탐욕성을 뚱뚱한 육체로 은유하였고 이를 J.S. 바흐 음악과 결합시켰다. 이와 같은 저속함과 고상함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통쾌한 웃음이 새어나오게 한다.

이러한 가면을 쓴 얼굴이 불러오는 양가성은 시각예술인 회화에서 더욱더 직접적이다. 벨기에의 표현주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의 그림은 육체를 가면으로 익명화하며 가면 뒤에 감추고 있는 괴상하고 추악한 우리의 진짜 모습을 조롱한다. 마치 광대의 웃음 속에서 고독이 비치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취약함 사이에서 진동하는 감정을 촉발한다.

좀 더 현대로 넘어오면, 가면을 벗고 더 직관적으로 육체를 표현한 미국의 화가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의 그림과 만나게 된다. 그의 후기 화풍이 구상회화로 바뀌면서 뚱뚱한 손, , 얼굴 등 만화적이고 어리숙한 육체가 그려진다. 이러한 그림 속에는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과 마주한 자기 분열, 인간 실존의 모순성이 담겨 있다. 또한 단순하고 익살스러운 이미지는 슬픔과 혐오, 폭력과 슬픔을 동시에 내포하는 양가적 감정 구조를 형성한다.

 

메이 비속 광기와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

다시 메이 비로 돌아가보자. 베케트의 세계관이 구현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메이 비가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예술의 깊이를 더했다는 평가를 받는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음악이다. 베케트 극과 마랭의 춤, 이 둘은 모두 진보성을 담보로 하고 있는 반면 클래식 음악어법의 전통성을 따르고 있는 슈베르트의 음악은 이들과 결이 사뭇 다르다. 그래서 서로의 만남은 지극히 매혹적이다.

무용수들이 격렬하게 중얼거리며 웃는 광기의 정점에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흐른다. 가곡 죽음과 소녀(D.531)와 현악사중주 14죽음과 소녀(D.810) 2악장이 모두 쓰이면서 이 작품의 핵심 정서인 인간 존재의 양가성을 더욱 꼽씹게 한다. 웃음과 비애, 언어와 침묵, 이성과 광기 사이의 충돌을 '목소리'로 응축해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여기에 더해진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이 선택은 단순한 배경음악 이상의 미학적 차원으로 승화된다.

이 장면에서의 중얼거림과 웃음의 소리는 정신적 붕괴의 징후이다. 말은 무너졌지만 존재는 여전히 울부짖고 있다. 이들의 중얼거림은 혼잣말로 시작되어 고함을 치듯이 광기적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좌절된 사랑 대상에 대한 분노이자 자신에게 돌아온 자기 비난의 화살이다. 이때 동반된 웃음은 비극적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그런 척하는, 표리부동한 상태를 감추는 위장된 기제이다. 프로이트의 견해를 빌리자면, 분노와 웃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일어나는 것은 멜랑콜리(우울증)의 증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격렬히 무너진 신체의 소리에 반하여 슈베르트의 음악은 잔잔하며 고요하게 그러나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무대를 감싼다. 춤의 광기와 정제된 음악의 대비는 정서적 충돌을 일으키며 관객의 감정을 교란시킨다. 이로써 양가성은 더욱더 심화된다. 따져보면, 죽음과 소녀는 '사랑(eros)과 죽음(thanatos)'의 근원적 명제에서 기인한 모순된 감정의 병치 그 자체 아닌가. 음악에 내재된 감정의 병치를 넘어 춤과 음악의 정서가 겹겹이 충돌되어 쌓인다.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2악장은 주제와 총 5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가곡 죽음과 소녀에서 죽음의 모티브를 주제로 하여 변주된 작품이다. 각 변주들은 리듬, 셈여림, 조성, 성부간의 짜임새 등의 변화를 통해 주제가 지속적으로 환기되며, 음악의 섬세한 변화가 춤의 드라마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음악은 붕괴된 신체 속에 유일하게 흐르고 있는 서사이자 말이 끝난 침묵 너머 인간의 감정을 대변하는 마지막 노래이다. 슈베르트 음악의 정서적 멜랑콜리는 질병의 멜랑콜리를 감싸 앉는다. 존재하는 것의 가혹함에 경이로움을, 엄혹함에 낭만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슈베르트의 음악이다.

 

한대섭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왈츠Op. 237

작곡가 한대섭은 전준호 작가의 하이퍼 리얼리즘(형제의 상)에서 구현된 한국 역사의 아픔과 부조리한 현실을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왈츠에 담아낸다.

전준호 작가의 하이퍼 리얼리즘(형제의 상)은 한국전쟁이라는 국가적 비극 속에서 다시 만난 두 형제의 장면을 통해 분단이라는 인간적 상흔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영상 작업이다. 국군 장교로 참전한 형 박규철과 인민군 병사가 된 동생 박용철. 그들은 총부리를 맞댄 전장에서 극적으로 재회하지만 이 만남은 포옹이 아닌 허공을 향한 몸짓으로 표현된다. 형은 동생을 껴안듯 몸을 움직이지만 왈츠를 추듯 끊임없이 맴돌고 있을 뿐이다.

한대섭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왈츠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닿을 듯 닿지 못하는 형제의 동선을 재현한다. 선회하는 왈츠의 구조를 닮은 리듬은 반복되며 제자리로 회귀하지만 반복 안에서 점차 왜곡되고 흔들린다. 리듬의 돌고 도는 형식은 점점 더 감정의 무게가 실리며 격해진다. 음정은 어둡고 날카로우며, 조성은 흐릿하게 경계에 머문다. 기쁘지만 고통이 교차하는 형제의 양가적 감정과 말을 잃은 분단의 상처를 음의 거리감과 조성의 모호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술에서 발현된 양가성에 우리는 왜 매료되는 것일까. 그 답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것은 예술이 인간 삶의 복합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양가적이며 부조리한데 예술이 그러한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고 감정의 균열을 일으켜 자아와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예술적 사유의 공간을 내어줌으로써 타자의 고통까지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예술로 말미암아 웃음과 눈물의 경계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글 이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