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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다시 듣는 현재의 상상력 -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현장음악2002’에 부침
기억은 다시 쓰인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과거와 마주한다. 그것은 단지 오래전의 사건이나 풍경을 되새기는 일이 아니다. 과거는 늘 현재의 감정 속에서 재구성되고, 상상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때로는 시 한 줄로, 때로는 오래된 사진 한 장으로, 혹은 음악 한 곡으로 말이다. 인간만이 지닌 이 특별한 능력—기억과 상상 사이를 오가며 내면의 풍경을 창조하는 힘—이야말로 시간을 초월해 소통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 작용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프레더릭 바틀릿(Frederic Bartlett)은 기억이 고정된 저장물이 아니라 회상할 때마다 현재의 정서와 인지에 따라 다시 구성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뇌과학적으로도 해마(Hippocampus)는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역할을, 전두엽(Prefrontal Cortex)은 그것을 현재 맥락에 맞게 편집하고 재조립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감정 중추인 편도체(Amygdala)가 개입하면, 특정 음악이나 장면이 특정 감정을 동반해 생생히 떠오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왜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시절의 감정과 풍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지를 설명해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인간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과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이 신경학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를 '정신적 시간여행(mental time travel)'이라 부르는데,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미래의 시나리오를 그려낸다. 즉, 기억은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기능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토대다. 과거의 조각들을 새로운 맥락에서 조합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서사적 구성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시 한 줄을 읽고 눈시울을 붉히거나, 오래된 사진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는 순간은 단지 추억에 젖는 행위가 아니다. 그 순간 우리의 뇌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정서로 재편집하고,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예술의 핵심이며, 음악과 문학이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다. 인간은 기억을 단순히 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다시 쓰고 해석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존재다.
기억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으로 끊임없이 갱신되는 창조다. 과거는 음악과 시, 사진과 이야기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그것은 곧 새로운 현재가 된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감정과 상상이 교차하는 ‘재구성된 기억’ 덕분이다. 그것은 내면의 정원이고, 시간의 수면 위에 떠 있는 감정의 파문이다. 그리고 그 파문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섬세한 흔적이다.
낡은 악보에 생기를 불어넣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이 지점에서 빛난다. 눈이 푹푹 내리는 어느 겨울날, ‘나타샤’는 단지 그리운 사람만이 아니다. 그녀는 과거의 감정이 현재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시인은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고 말하며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불러오고, 그리움은 현실보다 더 생생한 내면의 진실이 된다. 이처럼 과거는 기억의 창고에서 현재의 감정과 상상력을 재료로 하여, 다시 살아난다. 마치 낡은 악보에 생기를 불어넣는 연주처럼 말이다.
음악은 시간과 감정이 교차하는 예술이다.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이 작곡된 시점으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듣고 있는 현재의 감각과 정서로 과거를 다시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과거에 탄생한 선율은 현재의 공기 속에서 다시 숨 쉬고, 지금 이 순간의 귀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한 곡의 음악이 과거의 산물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음악이 시간 위를 흐르면서도 순간순간 감각의 밀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고전과 창작, 그 흐릿한 경계
모든 고전은 한때 ‘지금 여기’의 혁신이었다.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당대의 청중에게 낯설고 도전적인 새로운 창작물이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바흐조차도 처음에는 그들의 시대에 속한 생생한 '현재'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전과 창작은 뚜렷하게 나뉘는 두 개의 영역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연속체다. 새로운 음악이 충분히 삶과 시간을 통과하면 고전이 되고, 고전은 새로운 해석과 감각을 통해 다시금 창작처럼 살아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장음악2002"는 단순한 프로그램 제목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음악과 고전음악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정체성이자 선언이다. 화음챔버는 창작음악을 단지 '현대음악'이라는 시대적 분류로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새롭게 작곡된 음악이 연주되는 ‘현장’, 즉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청중과 마주하는 생생한 경험 자체에 주목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창작음악은 더 이상 소수의 음악가나 애호가들만의 것이 아니라, 고전음악처럼 깊이 있는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감정과 사고를 자극하는 예술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
동시에 화음챔버는 고전음악에 대해서도 고정된 해석이나 전통적 연주관에 머물지 않는다. 고전이 지닌 감각을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고, 과거의 울림을 오늘의 시선으로 되살려낸다. 이는 단지 연주의 방식이나 템포의 조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을 새로운 감각으로 맞이할 때, 그 음악은 더 이상 오래된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감정에 진동하는 동시대의 메시지가 된다. 이처럼 고전과 창작이 상호 변환 가능하며, 살아 숨 쉬는 예술로 재탄생하는 순간이 바로 ‘현장음악’이 지닌 힘이다.
음악은 지금 이곳에서 살아난다
‘현장음악’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의미한다. 이는 녹음된 음반이나 전통적 형식의 보존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소리의 생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이 음악은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사건이자 대화이며,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의 경험이다. 음악은 악보 속에 갇혀 있지 않으며, 무대 위와 객석 사이, 악기와 귀 사이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현장음악2002’는 하나의 실험이자 제안이다. 음악이 동시대의 예술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를 보여주는 무대, 그리고 모든 고전을 새롭게 만들고, 모든 창작을 고전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순간의 기록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만 가능하고, 이 호흡 속에서만 완성되는 음악. 그 유일무이한 음악적 대화는 우리가 음악과 맺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며, 인간적인 소통의 방식이다. 화음챔버는 그 소통의 장을 ‘현장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열어놓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음악을 통해 과거와 현재, 고전과 창작, 연주자와 청중, 나와 너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결국 삶 자체와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를 재해석하는 다섯 개의 음악
에이토르 빌라 로부스의 <브라질풍의 바흐 제9번>은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곡은 ‘전주곡과 푸가’라는 전형적인 바로크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빌라 로부스는 그 속에 브라질 민속의 리듬과 정서를 심는다. 구조는 바흐의 것이지만, 감성은 그의 시대, 그의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의 형식을 빌려오되 그것을 현재의 정체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음악적 ‘현재’를 창조한 셈이다. 이 곡이 연주될 때, 청중은 18세기의 독일과 20세기 중반의 브라질을 동시에 마주하는 시간의 교차점에 선다. 과거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재해석되며, 지금 이 순간의 감정 속에 살아 움직인다.
이은재의 <문묘>는 좀 더 정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다룬다. 문묘는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응축이다. 그곳에 들어서면 과거의 사유와 정신이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은재는 바로 그 ‘머무름’의 감각을 현악기의 섬세한 음향으로 풀어낸다. ‘오래 우려낸 침묵’이 음악으로 퍼져나가는 순간, 우리는 단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게 된다. 문묘라는 공간은 오래된 전통과 현재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이며, 그의 음악은 그 경계에서 펼쳐지는 무언의 대화이다. 과거를 경외하는 방식으로 현재에 안착시키는 이 작업은, 마치 공자의 위패 앞에 바치는 현대인의 침묵과 같다.
벤저민 브리튼의 <단순 교향곡>은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과거를 소환한다. 그는 어린 시절 작곡했던 테마들을 스무 살의 자신이 다시 꺼내와, 성숙한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단순히 옛 멜로디를 편곡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흔적과 시간의 결을 다시 읽고 새롭게 빚어낸 것이다. 특히 ‘감상적인 사라방드’에서는 그 절제된 서정 속에서, 성장한 자신이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정서가 배어 있다. 이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대화하는 순간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내면적 소통이다. 음악은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듬으며,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자아를 이해하게 한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현악 소나타 제3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유희한다. 열두 살 소년이 친구들과 여름날 라벤나에서 즐겁게 작곡했던 이 곡은, 오늘날 연주될 때 단지 어린 작곡가의 재능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곡을 듣는 우리는 그 시절의 밝고 경쾌한 정서를 현재의 복잡한 삶 속에서 마주하며,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올린다. 음악은 과거의 놀이가 되고, 현재의 회상이 되며, 그 유쾌한 리듬 속에 우리 마음 한켠의 천진함을 불러낸다. 로시니의 작품은 단순히 복고적 감상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기억의 열쇠가 된다.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옛 춤곡과 아리아 모음곡 제3번>은 가장 명시적으로 과거의 음악을 현재로 옮긴 예라 할 수 있다. 류트 음악, 고전적 춤곡, 궁정의 아리아—이 모두는 수백 년 전의 유산이지만, 레스피기의 손을 거치며 20세기의 세련된 감각으로 재구성된다. 그는 단순한 복원자가 아니라 해석자이며, 창조자다. 특히 <시칠리아나>나 <파사칼리아>와 같은 악장에서 드러나는 내성적 서정성과 구조적 절제는, 단순히 옛 선율을 ‘현대화’한 것을 넘어서, 현재의 청자가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과거의 음악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이 곡을 통해 과거의 궁정 무도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마음속 정원을 거니는 듯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결국 음악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가는 도구가 아니다. 음악은 시간을 겹겹이 쌓아올리고, 감정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지금 여기의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다. 음악은 시간을 녹여낸 감정의 풍경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지속한다.
과거는 죽은 시간이 아니다. 그건 지금 이 순간을 더욱 풍요롭고 섬세하게 만드는 배경이자 재료다. 사진 한 장, 시 한 구절, 오래된 선율 하나—그 모든 것이 현재의 감정과 만날 때, 우리는 새롭게 ‘살아 있는’ 과거를 만든다. 그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고, 그 현재는 더 이상 일회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과 맺는 가장 깊은 소통의 방식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정수다.
글 김인겸(음악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