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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2: 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상념
이민희 / 2025-03-01 / HIT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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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상념

 

끝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순환

인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했던가. 반짝이는 존재로 태어나 기력이 쇠하고 나이가 들며, 병에 걸려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 인간은 스스로 죽은 후를 알 수 없기에 많은 문명이 사후세계를 고민하고 종교를 만들었으며, 그 알 수 없는 세계를 예술로 상상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긴 시간을 노력했고, 죽음의 개념을 교리에 넣은 종교가 득세했다. 죽음을 다루는 수많은 노래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인기 있는 것들이었다. 죽음이란 모두에게 닥치는 평등한 것이었기에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모차르트의 <레퀴엠>, 그리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과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이 우리 곁에 늘 함께했다.

생각해 볼 것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사고하는 일관된 방식이다. 놀랍게도 인간은 이라는 이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끝이 없음이라는 맥락에서 사유해왔다. 예컨대 인간이 상상하는 대부분의 죽음은 순환함으로써 죽음 그 자체의 정지 상태에서 벗어난다. 죽음을 순환의 체계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또 다른 생의 모습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렇게 생로병사라고 하는 삶의 면면이 완성되고, 노인의 죽음에는 영아의 탄생이라는 신비로움이 따라붙는다. 비슷하게 일부 종교에서는 윤회(輪廻) 개념이 단단히 확립되었다. 힌두교, 불교, 고대 이집트교, 피타고라스 학파 등 수많은 종교는 죽음을 완전한 소멸로 보지 않으며 삶의 단계 중 하나로 여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런 개념은 죽음의 공포를 잠재우고,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지, 그리고 눈앞에 닥친 지금 여기의 환경과 생태가 어떤지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끝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순환은 생명과 자연의 본질이기도 하다. 노을이 지고 이내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오면 그 상태가 영원할 것 같지만 곧 여명이 시작된다. 아이가 태어나는 한편에서 노인이 죽는 것 또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자연은 죽음 이후의 모습에 대해 늘 온전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으며, 인간은 자연 안에서 살아가며 이 죽음의 성질에 대해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멈춤이 아니며, 흐르는 여정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한다는 것을 말이다.

 

병든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그의 자손

방 안에 병든 어머니와 그의 아들이 있다. 침대에 누운 어머니가 잠이 들자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곧 춤추는 이들의 환영이 몰려와 방안을 가득 메운다. 이는 소년 혹은 어머니의 꿈속이리라. 병든 어머니가 환영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내 춤추는 이들이 사라졌음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격렬한 춤을 춘다. 그때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죽음이 문을 세 번 두드리자 어머니를 광란으로 몰아넣었던 음악이 멈추고, 이 죽음이 죽은 남편의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방황하는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청년은 늙은 마녀가 사는 오두막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가 빵을 굽기도, 마녀를 위해 불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자 마녀는 청년에게 미래의 신부를 볼 수 있는 반지를 준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 여름의 숲이 펼쳐진다. 이글이글 내리쬐는 태양과 찬란한 초록 한 가운데에 젊은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야말로 청춘 그 자체다. 여인은 여행을 떠나려던 청년을 붙잡는다. 또 시간이 흘러 청년은 여인과 결혼을 했다. 청년은 돈을 모아 학교를 짓기도 하며 자신의 삶에 열중한다. 그러던 중 그의 집에 불이 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문득 청년은 불타는 집 앞에 서서 과거를 돌이켜본다. 그리고 화마 안에서 소년기에 목격했던 병든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불길 안에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청년이 죽음에 다다른 것일까? 그렇게 어머니의 모습을 한 죽음이 청년을 죽음으로 데려간다. 불이 난 집이 무너졌고, 청년이 그 안에서 죽은 것이다. 이제 아내와 아이들이 남아 죽은 청년을 기린다.

병든 어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소년. 이 소년이 자라 가정을 이루고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이 평범한 이야기는 핀란드의 극작가 예르네펠트(Arvid Järnefelt: 1861~1932)가 쓴 희곡 죽음(Kuolema)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흐름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삶의 강렬한 순환이 존재한다. 어머니가 죽기 전 최후의 순간에 만난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이며, 소년 또한 장성하여 죽기 직전 화마 안에서 그의 어머니를 마주친다.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 또한 먼 훗날 죽음 앞에서 청년을 떠올릴 것이다.

예르네펠트는 작곡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의 처남이었기에 이 희곡에는 시벨리우스가 쓴 6곡으로 이루어진 부수음악이 붙었다. 1903122일 공연된 이 연극은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삽입되었던 음악 일부는 유독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 병든 어머니, 침대 곁에 지친 소년, 점점 더 가까이 들리고 선명해지는 왈츠의 리듬, 기묘한 분위기, 잠자고 있던 어머니가 생의 마지막 춤을 추는 광적인 모습 등. 바로 이 장면에 삽입되었던 음악이 <슬픈 왈츠>(Valse triste, Op. 44/1, 1903/1904)이다. 음악으로 극대화된 죽음의 찰나는 죽음을 의식(儀式)으로서, 그리고 알 수 없는 다음의 단계를 위한 과정으로서 이해하게 한다. 반복되는 왈츠의 리듬, 강렬한 감정적 제스처, 병든 이가 추는 마지막 춤은 죽음의 순환성을 다시 한번 곱씹게 한다.

 

자연의 사그라짐, 석양

19세기 말, 서구 음악계는 기존의 음악문법이 식상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대대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실제 유럽인 상당수가 바그너의 광신도가 되어 그를 추종했고, 그렇게 바그너의 음악은 20세기 음악을 위한 새로운 모델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바그너를 여명으로 착각한 황혼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하늘을 물들인 이 빛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붉게 타오르는 것만 보고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사실 하늘에 드리운 빛이 도무지 붉은 기운이 강하다면, 이는 하루의 끝을 장식하는 석양일 가능성이 높다. 새벽녘 피어나는 해의 어스름이 좀 더 힘 있고 연한 빛을 띈다면, 석양은 무겁고 진한 빛을 지닌다.

거대한 둥글고 붉은 해가 지평선 또는 수평선으로 넘어갈 때 우리가 그 석양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곡가 박영희Younghi Pagh-Paan, 1965~)가 그의 작품 <현악합주를 위한 석양의 빛’>(화음프로젝트 Opus. 198, 2018)을 쓰며 남긴 말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또 순환하며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저 낮이라는 시간을 충만하게 만들어 주었던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석양이라는 시공간 안에 들어와 붉은 원형으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당혹스럽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붉게 또는 보라색으로 하늘이 물들고, 해가 맨눈에도 보이는 찰나이다. 이 시간이 되면 우리는 석양이 예고하는 완전한 밤을 상상하며 하루의 끝에 다다랐다는 압박을 받는다. 무언가 하나가 또 지나갔다는, 즉 하루가 죽었다는 감각. 물론 내일의 해가 뜰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석양이 주는 이러한 느낌이 수많은 상념을 자아낸다.

작곡가 박영희도 석양 앞에서 복잡다단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는 <석양의 빛>을 독특하게 작곡했다. 무대 위에는 두 그룹의 연주자가 등장한다. 무대 한 쪽에는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로 이루어진 다섯 명의 연주자 그룹이, 그리고 또 한쪽에는 현악앙상블이 조금 더 많은 연주자 구성으로 올라와 있다. 두 그룹의 연주자들이 무대에 서기에, 지휘자도 두 명이다. 그렇게 첫 번째 그룹의 다섯 연주자가 만드는 음악은 석양을 보며 생각하는 소리이다. 미래와 과거, 건강과 병듦, 어머니와 할머니, 아이들과 후손들, 투병하고 있는 오래된 벗과 갓 태어난 아기 등. 석양을 보며 해봄직한 수많은 상념들이 다섯 연주자가 풀어내는 추상적인 음의 조합으로 펼쳐진다. 물론 이 선율은 다소 낯선 음악어법으로 작곡되었다. 그럼에도 청중은 이 소리를 듣고 저마다의 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현악앙상블은 넓은 하늘에 펼쳐지는 여러 가지 색깔의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움을 재현한다. 자연의 색과 시간의 흐름을 노련하게 소리로 옮겨 놓는다.

그래서 박영희의 <석양의 빛>에서는 붉은빛이 보이고 들린다. 길게 잡아 끄는 현악기 특유의 활긋기가 이토록 탁월하게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을까? 연주자들이 긴 활로 생성해내는 한음 한음은 석양이 드리우는 긴 그림자와 같고, 여러 연주자가 미세한 음정으로 겹쳐 소리를 겨룰 때에는 붉은빛이 지평선 위에서 타오르는 것 같다. 여기에 하나가 더 합해진다. 박영희 작곡가 특유의 음악적 정서다. 그의 음악은 유독 호소적이며, 길게 뒤쫓는 듯 하고, 손에 땀을 쥔 채로 애간장을 닳게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이런 농밀한 긴장감이 그 자체로 석양이 주는 압도적인 시간의 응축을 닮았다. 석양 이후에 도래할 어둠을 풀어내는 자연의 힘처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여명을 준비하는 자연의 잠재력처럼 말이다.

 

|이민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