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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1: Memento Momenta 메멘토 모멘타
송주호 / 2025-02-01 / HIT :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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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Momenta 메멘토 모멘타

 

일상의 반복

아침 7, 알람이 울린다. 꿈결인지 현실인지 잠깐 고민하지만, 사실 그럴 겨를이 없다.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한 후 식탁에 앉아 빵 한 쪽을 집어 들었다. 무슨 잼을 바를지 순간 고민하지만, 나도 모르게 빨간색으로 손이 간다. 아무래도 빨간색이 눈에 잘 띄기는 하다. 출근길에 오르면 잠깐의 여유가 생긴다. 스마트폰으로 SNS와 뉴스를 확인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하지만 잠시일 뿐, 일터에 도착하면 의자와 한 몸이 된다. 쏟아지는 일에 몸 하나로는 부족하다. 아마도 오늘날 인간에게 가장 요구되는 기술은 분신술일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잠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시간 맞춰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형무소 격벽장에 잠시 풀어놓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는 일과를 마무리하고 해방감에 도취해본다. 어둑한 남색의 하늘에 지는 해가 그리는 붉은 그라데이션을 감상하며. 하지만 곧 깨닫는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당신도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최소한 그러길 바란다. 그래야 나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테니. 어쨌든 각자의 당연한 일상, 어제도 그렇게 살아왔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가겠지.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지금 이 시각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보면서, 이러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 오늘의 일상은 과거의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야 만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은 상황일 뿐이다. 차라리 기우(杞憂)였으면 좋으련만, 그동안 대부분의 인간은 아무런 준비 없이 각종 고통을 맞닥뜨리며 간신히 주어진 하나의 삶을 풍전등화처럼 살아왔다. 볼테르는 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인간의 탐욕이 가져온 다양한 비극(질병, 약탈, 처형, 전쟁 등)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풍자는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풍자 속에 비극은 더욱 쓰디쓴 고통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비극의 풍자에 몹시 언짢다. 인간의 고통에 쓴웃음을 강요하는 필체가 더욱 가슴을 후벼판다. 번스타인은 이 소설을 오페레타로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고통의 상징

그런데 이러한 인류의 고통이 특정 민족으로 대표된다는 것은 놀랍고,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남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약 260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흩어져 핍박을 받아온 유대인.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 있지 못하고 남들이 마다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성경이 죄악시하는 금융업이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돈이 삶의 주인이 되고 가치의 기준이 되는 자본주의는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 만든 경제 체계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20세기의 큰 격변의 순간에 그들은 희생의 중심에 있었고, 인류가 겪는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문학으로, 미술로, 건축으로, 그리고 음악으로 그려졌다.

특히 나치에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독일어권과 폴란드의 유대인들이 작곡한 음악작품들은 음표 하나하나에 안정되지 않은 심리가 새겨져 있다. 유쾌함 속에 불안이 숨겨져 있고, 방황하는 선율에 눈물의 강이 흐른다. 이들의 이름과 작품을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동안 잊혔으나 재조명을 받고 있는 작곡가 한 사람에 눈길이 간다.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Mieczysław Weinberg: 1919~1996). 독일과 달리, 폴란드에서는 지리상 서방으로 탈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안제이 파누프니크(Andrzej Panufnik: 1914~1991)는 운 좋게도 영국으로 망명했지만, 비톨드 루토스와프스키(Witold Lutosławski: 1913~1994)는 폴란드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바르샤바에 살고 있던 바인베르크는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곧바로 동쪽으로 향했다. 그의 부모와 여동생이 함께 나섰지만, 그들은 신발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아갔고, 그것이 가족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모두 워즈 게토(Łódź Ghetto)에 수용된 후 트라브니키 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혈혈단신으로 탈출에 성공한 바인베르크는 벨라루스 민스크를 거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정착했다. 그는 비극을 잊을 수 있을까? 적어도 모든 사람이 동등해서 동무’(товарищ)라고 부르는 공산주의에서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위험에 빠질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1943년에는 폴란드계 후손인 쇼스타코비치의 눈에 띄어 모스크바로 이주했을 때는 앞으로 꽃길만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모스크바에서 활동했던 이 기간에 작곡된 현을 위한 <교향곡 2>(1946)은 그래서 비교적 밝은 분위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과거의 슬픈 기억들과 그가 벗어날 수 없는 유대인의 운명의 목소리가 저변에 드리워져 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앞날에 대한 예술가적 예견이었을지도 모른다. 1948년 즈다노프의 서슬 퍼런 비판으로 그의 작품은 연주가 금지되었다! 이것은 단지 펜을 잠깐 놓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직책에서도 물러나 생존을 위협하는 큰 사건이었다. 작곡가들끼리 살기 위한 진흙탕 싸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 내로라하는 작곡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기에 서로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술의 고귀한 순교자였다. 하지만 소련이 시행한 반유대주의 정책은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공산주의에서는 모두가 노동 앞에 평등한 것 아니었던가? 유대인은 공산주의 이념으로도 포용될 수 없는 존재였다. “유대인은 나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떤 방어도 할 수 없는 인간이 겪을 모든 고통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에 대한 감정을 내 음악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고통을 유대인의 고통에 비유하며 그를 공감했다. 하지만 공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장인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사살되었고, 바인베르크는 항상 감시를 받았다. 그도 언제 어디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끝 모를 불안감으로 한 숨 한 숨을 쉬어갔다. 그러다 결국 19532월에 유대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가족과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장소와 시간이 다를 뿐, 벗어날 수 없는 유대인의 숙명에 체념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고통은 다음 달 스탈린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그저 스탈린이 문제였던 것이다.

 

갈등의 불길

우리나라도 오랜 역사에서 수많은 침탈과 전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유대인처럼 오래도록 나라를 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넓은 영토를 잃었고, 수많은 동포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심지어 좁은 반도에 둘로 갈라져 있다. 사람이 사는 데 담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고 행복한 날만이 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남겨진 자들이 감당해야 할 갈등의 불씨. 꺼뜨리면 좋겠건만, 누군가는 그 불씨를 가져다 살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이다. 남북으로 나뉜 것도 모자라 동서로 나뉘고 위아래로 나뉜다. 나뉘는 건 그렇다 해도, 폭력으로 발전하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자라난다. 그 불길을 분신으로써 대항했던 서승 교수! 19714월에 보안사에 의해 무고하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19년이나 옥살이를 했던 그가 맞선 것은 타자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강요였다. 그에게 생각의 강요는 자아의 죽음을 의미했고, 살아있음을 지키기 위해 분신으로 맞섰다. 이는 자아의 생존을 육신의 죽음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역설적 표현이다.

작곡가 강준일(1944~2015)<불의 전사>(2014)자신의 신념을 장렬하게 불태운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는 불굴의 정신으로 각인된 고통과 극복을 통해서 평화에 이르기까지의 승화된 모습이라는 서승 교수의 생각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그렇게 해서 <불의 전사>“Cogito, ergo sum,” 즉 생각이 존재이기에, 생각을 담은 이 작품은 존재의 기록이자 살아있음에 대한 헌사가 된다. 그리고 살아있음의 개가(凱歌)이다. 본래 이 곡은 비올라 두 대와 첼로, 더블베이스를 위한 중저음의 사중주로서 그늘의 세계에서 겪는 고통과 외침, 그리고 그들의 처절한 투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혹시 이를 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안성민의 작업(2023)은 작곡가의 의도를 가리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고통과 외침, 투쟁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작곡가가 서승 교수로부터 느낀 평화로의 승화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음악을 연주하라

20세기가 남겨준 갈등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아니,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유럽에서, 중동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매클루언의 말은 잘 알려졌지만, 우상이 되어 인간의 미디어로의 종속과 마비도 불러올 수 있다는 그의 우려는 들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만 보여주는 알고리듬 시대, 보고 들은 것만 다시 보고 듣는 에코챔버 시대, 핫미디어가 넘쳐나는 시대, 공존과 공감의 메시지는 더욱 들리지 않고 있다.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송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