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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14: 자연의 목소리
송주호 / 2026-05-01 / HIT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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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목소리

 

  새로운 봄에 비발디의 ‘봄’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꽃잎이 나풀나풀 떨어지는 때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제법 초록빛을 띤 잎사귀를 보며 새로운 봄을 즐길 것 같다. 언제가 되었든, 새로운 봄을 맞아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의 바이올린 협주곡 세트 ‘사계’를 들으며 1년 만에 찾아온 따스한 시간을 즐겨보려 한다. 먼저 첫 트랙, 〈봄〉을 들어본다.

 

  봄이 찾아와 새들은 즐거운 노래로 맞이하고,

  서늘한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시냇물은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흐르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며 봄의 전령인 번개와 천둥이 다가오고,

  그 소리가 잦아들자 새들은 다시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네.

 

  〈봄〉의 악보에는 네 계절에 맞는 싯구가 적혀있다. 작가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비발디가 직접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글은 머릿말도 아니고 오선보 위에 적어서, 음악이 특정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끔 했다. 연주자도 이 글을 보며 그 장면을 상상하며 연주할 것이고, 감상자는 음악을 들으며 그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악보까지 해설에 넣지는 않으니 잘못 이해할 우려가 있기는 하다. 어쨌든, 이 곡이 1725년에 출판된 ‘화성과 창의의 시도, Op. 8’이라는 열두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세트에 들어있는 것을 보니, 이렇게 시각적 장면 혹은 문학적 시나리오를 음악으로 묘사하는 것을 ‘시도’라고 보았을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에는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가사 없는 기악이 상상의 시각적 정보를 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의 봄도 이러할까? 새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위협적으로 날아다니는 비둘기나 앉은 나무까지 흔들거리는 커다란 까마귀의 소리는 그다지 즐겁게 들리지 않는다. 바람은 빌딩 숲 사이에서 돌풍이 되고, 시냇물은 여름 휴가철이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번개와 폭풍이 봄의 전령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는 조금 생뚱맞아 보인다. 300년 전 베네치아 인근 전원의 봄과 오늘날 서울 아파트 단지의 봄은 분명 다르다. 5월이 되면 부쩍 더워진 봄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겨울 다음에 여름’이 된 지는 오래라 새삼 이상해 보이지도 않지만,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중순에 이미 27도를 찍었다.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

  사실 인류의 역사에 환경이 사회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정확히 얘기하면, 현재의 환경 문제의 씨앗이 심긴 것이 그때였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덧 미래의 경고가 되었고, 이제는 오늘의 생활이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 문제가 언급되었지만, 그다지 나아진 건 없어 보인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정도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자주 언급되다 보니 경각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무뎌진 것은 아닐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로 계속 말해야 하며 계속 행동해야 한다. 문학가는 언어로, 미술가는 색으로, 음악가는 소리로. 나의 말이 세상에 울려 퍼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가 모여 세상의 목소리가 된다.

  미국 작곡가 데이빗 러드윅(David Ludwig *1974)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 것 같다. “따뜻한 비가 내리기 전에는 눈이 있었고, 큰 폭풍이 오기 전에는 시원한 가을날들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부 해안은 사계절이 뚜렷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지금은 잃어버렸다. 지구적인 기후 이변의 현실은 내게 중요한 문제였고, 그래서 나는 이러한 논의에 내 목소리를 더하기 위해 〈잃어버린 계절〉(Seasons Lost, 2012)을 썼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 작품은 환경 문제로부터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한 작곡가로서의 호소문이다. 봄으로 시작하여 겨울로 끝나는 일반적인 순서가 아닌, 겨울로 시작하여 가을로 끝나는 순서도 고려되었다. ‘가을’이면서도 떨어진다는 의미도 갖는 ‘Fall’을 마지막에 배치하여 경고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1악장 ‘겨울’은 “얼음처럼 푸른 빛이 감돌고, 공기가 맨살에 닿으면 따끔거리는 추운 날”을, 2악장 ‘봄’은 봄에 초록빛의 식물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3악장 ‘여름’은 모닥불 연기로 가득한 밤의 열기를 그린다. 그리고 마지막 4악장 ‘가을’은 “나무들을 바스락거리게 하고 잎사귀를 흔들어 땅에 떨어지게 하는 가을의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의 이미지”를 만든다. 이 모두 우리가 ‘잃어버린’ 계절의 모습이다.

  이렇게 자연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 문제의식으로 연결되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어쩔 수 없다. 머잖아 겪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경험, 혹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게 된 모습이기에. 다케미쓰 도루(武満 徹/Tōru Takemitsu, 1930-1996)의 〈바다를 향하여〉(Toward the Sea, 1981)는 평생토록 그의 음악적 주제가 되어온 바다를 그린 작품 중 하나지만, 이 곡만큼은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다르게 들린다. 고래 보호 캠페인을 위해 그린피스의 위촉을 받아 작곡된 작품인 만큼, 다케미쓰는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세상을 초월한 예술적 영감을 주던 바다, 이 곡에서는 반대로 바다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세 악장의 제목은 ‘밤’, ‘모비 딕’, ‘케이프 코드’로, 모두 고래를 소재로 한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서 왔다. 그는 악보에 소설에 한 구절을 인용해두었다. 이렇게 바다는 미국과 일본, 소설가와 작곡가, 그리고 130년의 간격을 넘어 두 작가를 영적으로 연결한다.

 

  사람은 가장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가장 깊은 꿈에 빠지게 되지. ...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너를 바다로 이끌 거야. ... 그래, 모두가 알듯이, 명상과 물은 영원히 결합하여 있지.

 

  이 곡은 본래 알토 플루트와 기타를 위한 곡으로, 알토 플루트의 낮은 저음은 고래의 울음소리를, 기타의 화음과 그 잔향은 바다의 심연을 형상화했다. 그리고 곡을 지배하는 Es(E♭)-E-A 세 음의 모티브는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다의 물결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두 악기를 알토 플루트와 하프(원곡대로 기타로 연주하기도 한다.)로 하고 현악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콘체르탄테 버전은 더욱 환상적인 아우라를 만든다. 특히 현악 오케스트라가 하프의 화음의 여운을 더욱 길게 끌면서, 바다는 훨씬 넓고 깊어진다. 이외에도 작곡자는 알토 플루트와 하프 버전, 그리고 알토 플루트와 마림바 버전도 만들어 두었다. 다케미쓰는 이렇게 한 곡을 다양한 버전으로 만드는 경우가 거의 없는 만큼, 이 곡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

 

  화음의 목소리

  바다라면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화음프로젝트로 작곡된 작품이 한 곡 떠오른다. 임지선 작곡가의 비올라 독주곡 〈검은 바다의 그림자〉(2008, 화음프로젝트 Op. 67). 이 곡은 2008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사진전을 위해 작곡되었다. (이 사진전은 열리지 못했다.) 소리로 전하는 고통과 호소는 폐부를 가른다는 표현이 딱 맞다. 다케미쓰가 바다의 생명을 노래했다면, 임지선은 생명을 잃은 바다에 대한 마지막 사투이자 고독한 레퀴엠이다. 8분의 시간 동안 고음과 저음, 느림과 빠름의 대비는 한 발은 삶에, 한 발은 죽음에 딛고 있는 모습 같다.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니고, 죽음이 함께 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그저 구원될 수 없는 고통이 있을 뿐. 그래서 임지선 작곡가는 마지막에 바다를 하늘로 올려보낸다. Lux Mare Æterna!

  이렇게 주제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곡이라면 한대섭의 현악삼중주곡 〈검은 숨〉(2015, 화음프로젝트 Op. 150)도 기억난다. 세라믹으로 나무의 질감을 만들고 검은 액체의 이미지를 더하여 오염된 자연을 표현한 크리스토퍼 데이빗 화이트(Christopher David White)의 조각 작품 ‘질식’(Asphyxia)이 이 곡을 위한 영감을 주었다. “나는 조각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를 바라보며, 대기를 잠식해가는 ‘검은 숨’을 상상했다. 현악기를 통해 공기 중에 스며드는 검은 숨결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기를 가득 메우고 우리를 질식시킬 듯이 감정을 뒤흔든다.” 곡 전체를 지배하는 떨림은 처음에는 그다지 인지되지 않지만, 점차 증가하면서 어느새 나의 정신을 압박한다. 나는 왜 음악을 들으며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좁은 방에 틀어박혀 수많은 시간 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는 자극을 기다리는 마조히스트였나? 어쩌면 환경은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자극해왔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자극 자체가 자연이 되었고, 어느덧 오염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살아있으나 산 것이 아니고, 죽음이 함께 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점점 구원받을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저 하늘로 들려 올릴 날만 기다릴 뿐.

  이제 자연의 표현은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자연의 그리움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그리고 환경에 대한 경고로 전환된다. 사실 예술 음악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힘은 미미할 수도 있다. 작곡가 네드 로렘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가장 의미를 전하기 어려운 예술은 음악이다. 음악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 hardest of all the arts to speak of is music, because music has no meaning to speak of.” Ned Rorem, “The Later Diaries of Ned Rorem: 1961–1972”, San Francisco: North Point Press (1983), p. 94

 하지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글|송주호(음악칼럼니스트)

 

Antonio Vivaldi: Violin Concerto ‘Spring’

https://youtu.be/3LiztfE1X7E?si=dlPWYH547xyXucI1

David Ludwig: Seasons Lost

https://youtu.be/YzD9zDcsLGQ?si=Ry2YjhoGXom63AAm

Tōru Takemitsu: Toward the Sea II

https://youtu.be/H6sujynpmiw?si=133H3Z_6g298a1zy

임지선: 검은 바다의 그림자

https://youtu.be/_zmJX8xIteQ?si=h39zFzOuZFNs9MmC

한대섭: 검은 숨

https://youtu.be/0-Z-7KdEQAA?si=-i3TBJb5sfB_i-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