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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10: 공간 속 사라져 버린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민희 / 2026-01-01 / HIT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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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속 사라져 버린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라져 버린 소리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가거나 미사가 끝난 예배당에 가 보면 유독 그 공간의 앰비언스가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본래는 어린아이들의 꺅꺅거리는 소리나 신자들의 경건한 노래가 가득 채웠을 공간들은, 그곳의 주인이 냈던 소리를 딱 덜어낸 만큼의 텅 빈 울림을 들려준다. 바람소리 아니면 웅웅거리는 소리로 귀가 먹먹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저 멀리서 텅텅거리는 저음의 발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다. 

 

백남준이 만든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1958-1962)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녹슬고 엉켜버린 릴 테이프가 네모난 액자 안에 박제되어 있는데, 전 세계에서 저 릴 테이프를 넣어 다시 재생할 수 있는 기계가 과연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낡았다. 네 개의 릴 테이프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아니면 유리 깨지는 소리나 수탉의 울음소리 등이 녹음되어 있다. 백남준은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진행한 플럭서스 퍼포먼스에서 이 릴 테이프에 담긴 소리 콜라주를 피아노 연주, 신체 퍼포먼스, 오브제를 결합해 선보였던 적이 있다. 여기서 사용했던 소리 조각을 나무 액자 안으로 옮겨, ‘오브제’ 형태로 덩그러니 보존한 것이다. 이제 이 액자 속의 릴 테이프가 실제로 ‘소리를 냈다는’ 사실은 잊힌 지 오래다. 소리들이 릴 테이프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제 극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오며, 저 소리가 본래 차지했을 청각적 범위만큼이 온전히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다. 

 

소리가 사라진 릴 테이프처럼, 도시와 시골에서 마주치는 교실들은 죄 비어있다.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을 두고 이제는 마을의 공동체에서 도맡아 여러 사업을 진행하곤 한다. 한 시골마을에서는 조각이나 설치를 전공한 예술가들이 교실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면이 온통 창이었던 초등학교 교실은 이제 검은색 암막 커튼이 걸리고 파티션으로 쪼개지며 수십 개의 오브제와 작업 재료들이 널렸다. 한쪽에 놓인 수납장은 유독 작아보였는데 아마도 교실의 천장이 유독 높아서 그런 것 같다. 또 다른 교실은 카페로 변했다. 건물 한쪽에는 햇빛 가리개가 설치된 임시 수영장을 설치해 두고 가족 단위 손님들이 오가며 사진도 찍고 소파에 앉아 쉴 수 있도록 넉넉한 공간을 만들었다. 유독 길게 뻗어있는 복도를 쭉 걷고 있노라면 이렇게 많은 교실들 하나하나에 도대체 무슨 콘셉트의 공간을 꾸며야 할까 고민이 들 정도다. 새롭게 탈바꿈된 전국의 교실들, 하지만 그 안에는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적은 수의 사람만이 돌아다닌다. 이제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 공간이 내뿜던 에너지나 아우라 그리고 소리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공간의 재활용은 소리의 재배치를 낳았으며, 한 교실마다 50명의 아이들이 토해내던 격렬한 소음은 이제는 부서져 버린 릴 테이프처럼 영원히 누군가의 기억이나 기록에만 남아 있는 관념적인 소리가 되었다. 

  

되살려낸 소리, 전현석의 <흩어진 점들>(화음 프로젝트 Op. 184, 2017)

그가 작곡가여서 그랬을까? 백남준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에서 작곡가 전현석은 여전히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리들이 액자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전현석은 나무 액자 안에 들어있는 네 개의 릴 테이프를 네 개의 악기로 상상했고, 그 네 귀퉁이를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설정했다. 곧 네 개의 ‘소리점’에는 서양음악사 안에서 가장 표준적인 앙상블인 현악4중주가 배치되었다. 그렇게 전현석은 액자 속 봉인된 관념적 소리를 현악4중주로 다시 만들어냈다. 

 

전현석의 현악사중주를 위한 <흩어진 점들>(Diffused dots, 2017)은 관객 전부를 네모난 공간에 집어넣고 연주한다. 예컨대 이 작품은 미술관에서 공연되되, 네 귀퉁이에 배치된 현악기 사이에 관객이 앉게 된다. 네 개의 릴 테이프 대신 바이올린·비올라·첼로가 소리를 내고, 그 확장된 액자의 공간 안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소리를 인지하고 증명하는 매개로서 ‘관객’이 동원되는 것이다. 그렇게 백남준의 오브제는 실제 관객의 도움을 받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실체가 된다. 

 

전현석의 작품을 듣기 위해 네 대의 악기 사이에 앉아있노라면 늦가을 따갑도록 몰아치는 찬바람 같은 것이 몸을 앞뒤로 감싸고 돈다. 네 대의 현악기는 관객 사이사이로 마치 회오리처럼 소리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데, 이 소리들은 유독 “불명료하고 거친 질감을” 가지고 있기에, ‘움직임’ 그 자체로 감지된다. 고요했던 미술관은 빠르고 불규칙하게 퍼져나가는, 마치 장애물을 만나 꺾였다가 다시 증폭되고 휘돌아 나오는, 작은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는 바람과 같은 소리로 가득 찬다. 이 소리들이 ‘움직임’을 강하게 내포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흥미롭다. 본래 살아있는 것들은 ‘소리’와 ‘움직임’을 떼려야 뗄 수 없을 터, 소리와 함께 오브제는 ‘죽음’에서 ‘살아있음’으로 변모했다. 소리란 본래 움직임과 한 몸이었고, 소리란 공기 속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전현석의 손 안에서 구성된 ‘움직임’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충만한 소리들로 구현되었다. 

 

주목할 것은 <흩어진 점들> 속 네 대의 악기가 마치 눈의 결정처럼 세련되고 균형 잡힌 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관객을 둘러싼 네 대의 악기는 비록 한 성부의 소리가 다른 성부의 소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반적인 흐름 안에서 유사한 그림의 반복을 그려낸다. 겨울나무가 빼곡한 숲 안에 서면 각각의 나무가 저마다의 땅을 움켜쥐고 가지를 드리운 것을 본다. 가지들은 제각각이고 그 뻗어나가는 모양도 다르지만, 위쪽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에 걸려있는 나뭇가지들은 제 나름의 규칙성을 갖고 정렬되어 있다. 전현석의 음악 속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들도 그렇다. 현을 떨고, 꺾고, 긁고, 소리를 확 줄였다가 다시 놀래키듯 큰 소리를 내는 움직임들은 저마다 다른 회오리를 만들어 내지만, 그러면서도 자연 속 생명체의 균집처럼 서로 딱 들어맞는 구석이 있다. 

 

따갑게 불던 현의 바람들은 곡 중반을 넘어가면서 오돌토돌한 좁쌀만한 눈으로 변화한다. 바람이 잠잠해진 가운데 균질한 작은 결정으로 느리게 떨어지는 눈. 네 대의 현악기가 여린 세기로 현을 튕기는 움직임이다. 다시 눈은 잦아들어 여리고 미세한 바람이 날아 드는데, 이제 소리는 고음역에서 연주되며 그 울림 또한 현의 장력을 거스르지 않고 현에 살짝만 마찰만 한 채다. 배음의 일부를 가늘고 여린 세기로 증폭한 이런 소리들에 다시 굽이굽이 돌아드는  현악기의 트레몰로가 겹친다. 그러면서 소리의 움직임이 점점 멈춘다. 소리가 잦아들면서 곡에는 빈 공간이 많아지고, 그렇게 ‘움직임’이 멈추며 ‘소리’가 사라진다. 공간 안에는 이제 다시 ‘텅 빈 감각’ 즉 고요와 죽음만이 가득하다. 

 

다시 상상하고 만들어내야 할 소리, <프렉탈 거북선>

대전시립미술관의 메인 전시관을 올라가기 직전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형광색 아크릴로 만든 듯한 작은 네모의 조형물이 특이하게 서 있다. 창고도 아닌, 오브제도 아닌 독특한 네모의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놀랍게도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이곳이 바로 ‘열린수장고’이다. 대전시립미술관은 로비나 전시실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것뿐 아니라 수장고를 운영해 작품의 구입과 보존을 행하는데, 이 수장고를 일부 오픈해 작품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2025년 11월의 어느 날 홀리듯 들어간 형광색의 네모 창고 안에는 놀랍게도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이 전시되어 있었다. <프랙탈 거북선>은 1993년 대전엑스포를 기념해 재생조형관에 설치되었던 작품으로 309개의 모니터와 옛 가정에서 쓰던 TV, 축음기, 카메라, 실제 거북이의 박제 등을 한데 엮어 ‘거북선’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엑스포 직후 지하에 방치되다가 2001년 대전시립미술관의 로비에 설치되었는데 세월을 겪으며 계속 부서져 갔다. 다시 이를 복원해 바로 이 ‘수장고’의 방 한 켠에 설치해 둔 것이다. 

 

매일 4시에서 6시에는 이 거북선이 실제 ‘작동’을 하는 시간도 있어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였다. 거북선은 말끔한 화면으로 색색의 불빛을 뿜어내고, 거북선 뒤편에는 ‘한산도’를 상징하는 추가 조형물도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등껍질의 굴곡을 멋지게 간직한 채 붙어있는 거북이 박제는 말 그대로 ‘프랙탈’ 형태로 거북이의 반복적 재현을 충실히 했다. 여기저기 더부살이를 하며 세월을 맞아 망가지곤 했던 거북선이었지만, 이제 다시 자리 잡은 수장고 안쪽 공간은 거북선 하나가 딱 들어가기에 안락한 크기였다. 마치 거북선의 몸에 꼭 맞은 개인 케이스 같았달까. 그런데 완전하게 복원된 <프랙탈 거북선>을 바라보며 이 거북선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기이했다. 그 어디에도 소리는 없었다. 

 

위풍당당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프랙탈 거북선>. 현 시대에 백남준이 살아있었더라면 어떤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이 오브제의 숨결과도 같은 사운드를 디자인해 넣었으리라. 본래 백남준이 만들었던 1993년의 <프랙탈 거북선>은 1,450만명의 인파 가운데에서 당시 대전의 과학도시를 상징하는 위트있는 오브제였기에, 그 곁에는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치렀던 전투보다도 더 많은 인원이 함께 북적였다. 그것이 거북선의 생동감이었고 주변의 두런거리는 소음이 그 자체의 소리 였을 터, 이제 수장고 한쪽 자신만의 케이스에 자리 잡은 거북선은 말끔하게 변모한 외형과 함께 고요한 채다. 움직임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다든지, 아니면 거북선이 애초에 이끌었던 수만의 전투대원이라든지, 모든 것이 사라져다. 

 

<프랙탈 거북선>의 표면에 붙은 309개의 모니터 중 단 한 개에서라도 소리가 날 것을 기대해 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사라져 버린 공간 속 생명들을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상상해 본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매끈한 형체의 깔끔한 움직임을 하는 기계들은 점점 ‘소음’을 줄여가고 있다. 덜컹덜컹 하던 기차가 스르륵 움직이던 시기를 지나, 이제 바로 옆에 자동차가 와 있어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사라져 버린 소리를 고민하며, <프랙탈 거북선>이 움직이면 어떤 소리가 날지 귓속으로 따라가 본다. 

  

글|이민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