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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16: 경계에 선 이방인의 노래
노지은 / 2026-08-01 / HIT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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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선 이방인의 노래>

낯선 도시를 오래 걷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어느 순간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의 경계가 흐려진다. 언어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주 걷는 길은 몸이 먼저 기억하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느새 하루의 풍경이 된다.

10여 년 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 머물던 시절, 시간이 날 때마다 오페라극장을 찾았다. 학생증 하나만 있으면 공연 시작 직전 남은 자리에 무료로 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 앞에는 늘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악보나 대본을 들고 서 있는 예술대학 학생들, 공연을 기다리는 노년의 단골들,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러 온 연인들. 문이 열리면 모두가 안내원의 손짓을 따라 조용히 객석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들은 아제르바이잔 음악은 그저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음악 무감(muğam)은 시작과 끝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긴 호흡 속에서 흐르다가, 어느 순간 거칠게 치솟는 가락을 품고 있었다. 비서구 문화권에서 온 내가 또 다른 비서구의 음악을 만난 셈이었다. 완전히 다른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 어딘가 닮은 결이 느껴졌다. 강대국 사이에서 분단과 분쟁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에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상실과 기다림의 정서가 스며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낯설어야 마땅한데 낯설지 않은 그들의 음악 속으로 나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머물되 속하지 않는 사람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1908년 글 〈이방인〉에서 이방인을 오늘 와서 내일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와서 내일도 머무는 사람으로 설명했다. 그는 공동체 안에 있지만 끝내 완전히 속하지는 않는다. 짐멜에게 이 거리감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능력에 가깝다. 너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람은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나는 바쿠에서 그런 존재였다. 매일 오르내리던 지하철역 ‘가라 가라예브(Qara Qarayev)’가 아제르바이잔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너무 익숙해 새삼 의식되지 않는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나에게 그 이름은 매번 작은 발견이었다. 그렇게 거리는 매일 더 가까워졌지만, 그 거리는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라지지 않는 거리 덕분에, 완전히 속한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나에게는 또렷이 들렸다.

 

오선 위를 떠도는 노래

바쿠에서 지내는 동안 아제르바이잔 음악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낯선 것이 낯선 채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듣는 선율인데도 어딘가 오래 알고 있던 감정처럼 다가왔고,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도 어떤 정서는 이미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작곡가 피크레트 아미로프(Fikret Amirov, 1922-1984)의 〈아시크의 노래〉를 들을 때도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 곡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소품》(1976)의 첫 곡으로, 아미로프가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무감의 어법과 모스크바에서 배운 서양 작곡기법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음악이다.

아시크(Ashug)는 사즈를 들고 마을과 마을 사이를 떠돌며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다. 그들의 노래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길 위에서 피어난다. 〈아시크의 노래〉 역시 낯선 곳에 선 아시크가 자신의 곡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듯 비장한 분위기로 장을 연다. 피아노의 고음에서 유니즌으로 지속되는 C음은 아시크의 당당한 발걸음이 되고, 플루트는 그 오선 위를 떠도는 그의 노랫말이 된다. 중반부에 이르면 음악은 긴 호흡으로 돌아서지만,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D♭음은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E♭장조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끝내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않는 음.

사실 아미로프가 옮겨온 것은 무감의 선율 그 자체라기보다, 무감이 생성되는 방식이다. 이 곡은 분명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서양 실내악의 편성 안에 놓여 있고, 모든 소리는 오선 위에 정확히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의 선율은 그대로 반복되지 않고, 매번 조금씩 흔들리고 변주된다. 조성적 체계를 벗어난 음들은 이 곡이 오선 위에 적혀 있음에도 이방의 노래임을 환기한다. 그 아슬아슬하고 모호한 울림은 바쿠의 이방인이었던 나에게 묘한 거리감을 주면서 동시에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던 아시크의 목소리는 플루트와 피아노의 선율을 타고 또 다른 이방인의 마음을 울린다.

 

다시 낯선 얼굴로

내게 바쿠가 그랬듯, 임지선에게 부다페스트는 익숙한 세계의 경계가 흔들리는 장소였을 것이다. 낯선 도시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각을 예민하게 깨운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와 풍경이 이상하게 또렷해지고, 그 도시의 언어를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소리의 표정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임지선은 2016년 여름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한 달의 감각을 《부다페스트의 이방인》(2017, 클라리넷·첼로·피아노)으로 남겼다. 이방인의 자리에서 들은 헝가리 민요 〈봄바람 물결 만드네(Tavaszi szél vizet áraszt)〉는 이 곡의 재료가 되었다.

곡은 첼로의 하행하는 두 음 화음으로 시작한다. 하모닉스로 희미하게 떠 있는 음과 낮게 가라앉은 음은 테트라코드를 이루어 자리를 바꿔가며 진행되고, 피아노는 저음에서 특정 음을 길게 지속시킨다. 이 오르간포인트, 혹은 드론에 가까운 울림은 곡의 시작부터 민속적 색채를 은근히 드러낸다. 그 위로 클라리넷이 첼로와는 반대로 상행하는 선율을 노래하며 합류한다. 내려가는 소리와 올라가는 소리, 머무는 소리와 떠나는 소리가 한 공간 안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 시작은 내게 낯선 도시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감각처럼 들린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하지만, 그 안의 관계는 아직 낯설고 불안정하다.

중반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는 뒤돌아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고, 피아노 내부의 현을 향해 숨을 불어넣으며 연주를 지속한다.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이방인이 낯선 영역의 내부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듯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클라리넷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낯선 곳을 향해 걸어갔다 돌아온 뒤, 같은 자리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듯이. 이 곡에서 헝가리 민요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흩어지고, 비껴가고, 다른 악기의 몸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낯선 얼굴로 나타난다. 이방인의 귀에 들어온 노래는 더 이상 원래의 노래일 수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헝가리 민요는 때로는 선명하게 들리지만, 어느 순간 자유롭게 해체되어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익숙한 노래가 낯선 소리가 되고, 낯선 소리 속에서 다시 익숙한 흔적이 떠오른다. 이 음악이 ‘익숙함’과 ‘낯설음’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단지 민요를 변형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익숙한 것을 끝내 익숙한 자리에만 두지 않고, 낯선 것을 끝내 낯선 바깥에만 밀어두지 않기 때문이다. 임지선의 《부다페스트의 이방인》은 그 거리의 차이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음악의 내부로 끌어들인다.

 

사라지기 전에야 들리는 거리

아미로프와 임지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계 위의 노래를 들려준다. 아미로프가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무감을 서양 악기와 양식을 빌려 오선보에 옮겼다면, 임지선은 자신의 것이 아닌, 낯선 땅에서 우연히 만난 노래를 오선보에 옮겼다. 한쪽은 제 안의 것을 들고 경계로 나섰고, 다른 한쪽은 경계 너머의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음악이 결국 닮아 보이는 것은, 어느 쪽도 그 선율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미로프는 무감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서양음악의 틀에 녹여 다시 듣게 만들었고, 임지선은 민요를 완전히 해체하면서도 그 흔적을 끝내 지우지 않아 매번 다른 모습으로 그 노래를 다시 듣게 만들었다.

바쿠에서의 마지막 밤, 나는 다시 그 계단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고 빈자리를 기다리는 일도 익숙했지만,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그 풍경은 더는 당연하지 않았다. 곧 사라질 것이기에, 그제야 그 계단과 그 사람들과 그 노래가 다시 선명하게 보였다. 이방인으로 머무는 동안 나는 그 도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도시를 한 번도 완전히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음악도 그렇게 듣는 것인지 모른다.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전, 그 짧고 불안정한 거리에서만 들리는 노래가 있다. 아미로프와 임지선이 들려준 것은 바로 그 거리의 노래, 경계에 선 이방인의 노래였으리라.

 

※ 감상곡 링크

- 피크레트 아미로브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소품》(1976):

 https://youtu.be/WyCpVEM3zDM?si=zLX2OdHAt839jQDK

- 임지선 - 《부다페스트의 이방인》(2017):

https://youtu.be/zV4YkO8M84s?si=0ZYPhCHirRoSEL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