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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um Critics' Collection

Hwaum Critics' Collection No. 15: 아름다움은 부차적인 것
이소연 / 2026-06-01 / HIT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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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부차적인 것

 

"Rasendes Zeitmaß. Wild. Tonschönheit ist Nebensache."

광란의 속도. 거칠게. 음색의 아름다움은 부차적이다.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는 1922년 작곡한 〈비올라 솔로 소나타 Op. 25-1〉 4악장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연주자에게 아름다운 음색을 내지 말라는 이 지시어는 단순한 기술적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 년이 지난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이었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부차적이라면 일차적인 것은 무엇인가. 2026년 4월,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의 TAP 극장에서 나는 이 질문과 다시 마주했다. 무용수이자 비올라 연주자 폴 피(Pol Pi)의 〈Schönheit ist Nebensache〉가 무대 위에서 펼쳐졌을 때였다. 

 

아름다움을 거부한 음악 

힌데미트의 〈비올라 솔로 소나타 Op. 25-1〉은 무반주 비올라 소나타로 총 5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올리스트인 그가 단순히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을 만든 것이 아니라 악기의 정체성을 새롭게 선언한 곡이다. 그동안 비올라는 오케스트라나 실내악에서 중간 성부를 채우는 역할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이 곡에서는 악기의 기교적, 표현적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비올라는 내면을 읊조리는 철학적 독백과 몸의 에너지를 날것으로 쏟아내는 거친 육체성, 이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 곡은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니다. "Tonschönheit ist Nebensache." 4악장에 달린 이 지시어는 이전까지 우리가 음악에 기대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뒤엎는 선언이다. 느린 악장은 침묵과 독백 사이 어딘가를 배회한다. 선율은 어둡게 읊조리지만 긴장은 한순간도 풀리지 않는다. 마치 전투 전야의 고요함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불안감을 조성한다. 마침내 4악장에서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된다. 활은 현을 가르듯 날카롭고, 음정은 경고 없이 추락하거나 솟구치며, 불협화음은 해결을 기다리지 않고 쌓인다. 날을 세운 채 질주하는 이 음악 앞에서 귀는 아름다움을 찾기를 포기한다. 전쟁의 무력과 폭력이 이 짧은 악장 속에 광풍처럼 쏟아진다. 그는 왜 아름다운 소리를 거부했을까.

 

1922년 힌데미트가 이 소나타를 쓰던 시기는 미의 기준이 전례 없이 분열되던 때였다. 독일 제국은 무너졌고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으며 전쟁의 폐허 위에서 기존의 가치 체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했다. 무너진 것들 앞에서 시대의 예술가들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위선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그들은 아름다운 예술보다 새로운 현실을 이야기할 언어를 찾고자 했다. 수백만이 죽어간 세상에서 조화로운 화음과 형식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힌데미트가 찾은 대답은 아름다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삼기를 멈추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은 진실을 말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부산물일 뿐이었다.

 

나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개입했다. 그들이 강요한 아름다움은 조화롭고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조화로운 것은 독일적인 것이고, 독일적인 것은 옳은 것이었다. 이 등식 안에서 불협화음은 단순히 음악적 문제가 아니라 체제에 대한 거부였다. 1936년 힌데미트의 음악은 금지되었고, 1938년 뒤셀도르프 '퇴폐 음악(Entartete Musik)' 전시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질문한 자는 그 기준 위에 세워진 권력 전체를 흔드는 자다. 힌데미트는 독일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질문은 머물렀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른 시간, 다른 이의 몸으로 건너갔다.

 

폴 피의 시간, 몸

올해 4월 아콥스 페스티벌(À Corps festival)에서 폴 피가 무대에 올랐다. 작품의 제목은 <Schönheit ist Nebensache>. 힌데미트가 악보에 남긴 그 지시어가 이제 폴 피의 작품 제목이 되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사람과 춤을 추는 사람은 같은 몸이 되었다. 

 

공연은 힌데미트의 소나타로 시작되었다. 활이 현을 그을 때마다 그의 상체는 미세하게 무게중심을 이동했고, 팔꿈치와 어깨는 소리의 방향을 따라 공간 속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연주를 하다가 어느 순간 비올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춤을 추었다. 그것은 음악에서 춤으로의 전환처럼 보이지 않았다. 음악이 악기의 경계를 넘어 몸 전체로 번지다가 더 이상 악기로는 담을 수 없게 된 것이 움직임으로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팔이 공간을 가르고 무게가 한쪽 발로 쏟아지며 척추가 낮게 꺾였다. 선율이 몸의 언어로 계속되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는 다시 활을 집어 들었다. 춤이 언어의 한계에 닿았을 때 몸의 기억이 음악 안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활이 현에 닿는 순간, 소리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소리가 아니었다. 몸을 통과한 음악이었다. 

그가 춘 춤은 도레 호이어(Dore Hoyer)의 〈아펙토스 우마노스(Afectos Humanos)〉다. 1962년 초연된 이 작품은 인간의 다섯 감정인 허영, 욕망, 공포, 증오, 사랑을 각각 하나의 독립된 춤으로 번역한 연작이다. 호이어는 각 감정에 고유한 신체의 논리를 부여했다. 허영을 춤출 때 그녀의 몸은 팽창하고 공간을 점령했다. 욕망은 완급을 반복하는 강렬한 몸으로, 공포는 안으로 수축하고 굳어가는 몸이었다. 증오는 몸의 모든 에너지가 날을 세우듯 진동했고, 사랑은 그 모든 긴장이 소진된 자리에서 조용히 무너지는 몸이었다. 각 감정은 아름답게 표현되지 않았다. 

 

힌데미트가 아름다운 음색을 거부했듯 호이어는 아름다운 형태를 거부했다. 독일 표현주의 안무가인 그녀에게 춤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진실은 때로 추했고 불편했으며 전후 독일이 원하는 것과 달랐다. 전쟁이 끝난 독일은 새로운 질서와 밝은 미래를 원했다. 상처를 날것으로 드러내는 표현주의 무용은 그 시대가 기꺼이 환영하는 예술이 아니었다. 힌데미트가 나치의 미학적 기준에서 추방되었듯, 호이어는 전후 독일의 낙관주의적 기대에서 밀려났다. 시대는 달랐지만 구조는 같았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거부한 자는 그 기준이 만들어낸 무대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메리 비그만(Mary Wigman)은 그녀를 "유럽의 마지막 위대한 현대 무용수"라 불렀다. 그러나 그 찬사는 그녀를 붙잡아두지 못했다. 호이어는 점점 고립되었고 공연장은 점점 비어갔다. 1967년 12월 31일, 그 텅 빈 객석 앞에서 마지막 공연을 마친 그날 밤 그녀는 생을 마감했다.  

 

음악과 춤 사이사이에 폴 피는 편지를 읽는다. 힌데미트가 망명지에서 쓴 편지. 호이어가 텅 빈 객석 앞에서 쓴 편지. 전체주의의 시대를 살아낸 두 예술가의 목소리가 2026년의 폴 피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그가 이 역사적 작업을 수행할 때 과거의 질문들은 현재 그의 몸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1922년의 힌데미트, 1962년의 호이어, 2026년의 폴 피.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지만 같은 물음 앞에 섰다. 아름다움이 부차적이라면 예술에서 일차적인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 부차적이라면 

힌데미트의 대답은 소리 안에 있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그가 찾은 것은 더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라 시대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소리였다. 호이어의 대답은 몸 안에 있었다. 허영과 욕망과 사랑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들이 요구하는 대로 몸을 내어주는 것. 인간 내면의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힌데미트의 음악에서 신체성을 감각했다. 저음으로 떨어지는 진행은 착지하는 몸이고, 높은 음으로 치솟는 도약은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몸이며, 해결 없이 축적되는 긴장은 균형을 잃다가 다시 서는 몸이다. 연주자의 몸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된다. '아름다운 음색은 부차적'이라는 힌데미트의 지시어는 결과적으로 청각적 쾌감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몸의 에너지를 소리의 장식이 아니라 표현의 필연성에 바치라는 것이다. 폴 피는 힌데미트 음악에 응축된 정념들이 필연적으로 불편한 몸짓을 불러낸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펙토스 우마노스〉는 원래 힌데미트의 음악과 무관하게 탄생했다. 호이어가 안무를 붙인 것은 다른 음악이었다. 폴 피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힌데미트를 연주하다 악기를 내려놓고 호이어의 몸짓으로 들어간다. 힌데미트 음악에 내재된 신체성과 호이어의 움직임이 본래 하나의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의 춤은 외부의 음악이 사라진 무음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침묵은 비어있지 않다. 방금 전까지 공간을 가득 채우던 힌데미트의 긁히고 갈라지고 날을 세우던 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폴 피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침묵은 음악의 부재가 아니라 음악이 몸으로 전이된 상태다. 그 몸이 호이어의 춤을 출 때, 힌데미트의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움직임의 밀도와 무게와 속도로 살아있다. 그는 힌데미트의 악보와 호이어의 춤을 해석한 것이 아니다. 자기 몸에서 제3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힌데미트의 음악은 감정을 들리게 하고, 호이어의 춤은 감정을 보이게 한다. 이 둘이 한 몸 안에서 만날 때 그것은 두 예술 형식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논리의 완성이다.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했으리라는 확신, 다름 아닌 필연성이다.

 

아름다움은 목적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의 필연성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부차적인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인 것, 다시 말해 진실, 내면, 그리고 표현의 필연성이 완성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힌데미트는 그것을 악보에 썼다. 호이어는 그것을 몸으로 살았다. 폴 피는 지금 그것을 연주하고 동시에 춤추고 있다. 호이어가 힌데미트의 음악으로 춤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폴 피의 선택의 필연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시간과 언어로, 같은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도달했다. 폴 피는 두 사람이 바라본 방향이 결국 한 곳을 향하고 있었음을 발견했고,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처음 실현했다.

 

〈날의 벽〉 앞에 선 소리

힌데미트와 호이어가 살아낸 이 질문은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예술이 고통과 마주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정연두 작가의 〈날의 벽〉(2023)은 이 물음이 한국의 예술가들에게도 닿았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과 유사한 사유에서 출발한 이 작업에서 벽은 공간의 경계가 아니라 날들이 쌓여 만들어진 시간의 퇴적물이다. 통곡의 벽이 집단사의 균열을 품고 있다면, 〈날의 벽〉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노동해야 했던 이주민들의 개인적 상실과 인내를 담는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의 무게 자체가 이 벽을 쌓았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위촉작들은 이 흐름을 음악의 언어로 이어받는다. 이재구의 비올라 독주곡 〈생동하는 분자들의 외침〉(2023, 화음프로젝트 Op. 227)은 언어 이전의 떨림에서 출발한다. 불규칙한 리듬과 진동하는 음형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생명의 에너지가 있다. 힌데미트가 4악장의 불협화음 속에서 전쟁의 상흔을 소리로 만들었듯 이재구는 백여 년 전 멕시코 이민자들의 고통을 진동으로 번역한다. 임지선의 콘트라베이스 독주곡 〈디아스포라〉(2023, 화음프로젝트 Op. 226)에는 떠남의 무게가 실려 있다. 콘트라베이스의 강하고 무거운 음향은 몸 전체를 뿌리째 옮기는 사건으로서의 이주를 감각하게 한다. 간간히 들리는 노랫가락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듯하면서도 완전히 되살아나지 못한 채 흔적으로만 남는다. 힌데미트가 소리를 아름답게 다듬기를 멈추고 진실에 복종시켰듯 이 두 작품도 아름다움보다 삶의 결을 택한다.

 

힌데미트는 1922년 악보 위에 썼다. 아름다운 음색은 부차적이라고. 그 말은 선언이었고 질문이었으며 시대를 향한 윤리적 입장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 말이 백 년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폴 피의 몸을 통과했고, 이 벽 앞에 선 소리 안에서도 울리고 있다. 벽과 몸 사이에 소리가 울린다. 그것은 금이 간 표면, 떨리는 몸, 긁히는 현 위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에 그 소리는 필연적이다. 그 소리가 아니면 안 되었을 이유, 그것이 예술이 진실에 닿는 방식이다.

 

글 | 이소연 무용음악학자

음악과 춤이 만나는 접점에서 그 공간의 깊이를 사유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6년 한국서양음악학회 ‘차세대 음악학자 우수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발간한 『고전의 유산』, 『삶, 듣다』의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온라인무용플랫폼 '아츠인탱크'의 공동대표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이다. (soyeonbes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