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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현장음악 2002 새롭게 피어나는 고전] 고전과 새로움 사이, 그 수많은 가능성
송주호 / 2025-05-27 / HIT : 45

현장음악2002 Ⅰ: 새롭게 피어나는 고전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상연(지휘)

2025년 4월 16일(수) 오후 7:30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고전과 새로움 사이, 그 수많은 가능성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

 

 

 

대중이 원하는 것

 

익숙함과 낯섦, 오래됨과 새로움, 지루함과 신선함….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이 썩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항상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극단적 판단을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 내린 판단은 행동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 상반된 두 성질은 매우 다른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우리의 정신 속에서 비슷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래서 상통하면서도 오버랩되기도 한다. 오래된 것인데 신선하다거나, 낯설지만 지루하다거나, 익숙하면서도 새로워 보인다거나…. 이러한 성질의 교차는 충격과 혼란을 주곤 하는데, 사실 예술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상황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가 익숙함 속에서 낯섦을 추구하고, 오래됨 속에 새로움을 채운다. 예술가들을 심히 고민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성질의 교차다.

그런데 잘못된 교차 설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중성’이라는 속성이 그중 하나다. 대중이 작품의 가치를 어려움 없이 수용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경우 선택하는 것이 익숙함 혹은 오래됨이다. 음악을 예로 들면, 조성이라는 하는 익숙한 화성 시스템, ‘머니 코드’와 같은 오래된 화음렬, ‘교향곡’과 같은 유서 깊은 장르 등. 익숙함과 오래됨은 공통된 점이 많다. 하지만 이 둘의 결합은 큰 부작용을 낳는다. 예를 들면, 클리셰를 합리화하거나 지루함을 새로운 가치로 포장한다. 지루함을 의도하는 작품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 대부분은 그러한 결과를 원치는 않는다. 대중의 선택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대중성이 있다고 혹은 대중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대중을 오해한 것이다.

대중성이 요청하는 것은 익숙함과 낯섦의, 그리고 오래됨과 새로움의 조화다.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두 성질의 동시성이 대중성 획득의 길을 좁힌다. 이 길을 잘 따라가는 방법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일지향성이다. 익숙한 것만 따라가다가 낯섦을 놓친다던가, 새로움만 찾다가 오래됨을 외면한다면 대중성에 이르지 못하는 무수한 지류로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 둘은 감상으로 파악되는 파악가능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둘을 감상을 통해 구분하지 못한다면 (혹은 분석을 통해서만 파악이 가능하다면) 대중은 그 작품을 한쪽으로만 보게 될 것이고 임의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파악가능성은 대중성의 문을 더욱 작게 만든다. 오늘날 소위 ‘정전’(正典, canon)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좁은 길과 좁은 문을 통과한 매우 소수의 생존자들이다.

이렇게 볼 때, 익숙하고 오래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낯설게 만드는 작업은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이면서도 꼭 필요한 과제가 된다. 아니, 주요 과업이 된다. 음악의 측면에서 보면, 그래서 끊임없이 아리랑은 재생산되고, 과거의 음악이 인용되며, 리메이크 혹은 리믹스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성과 같은 오래된 작곡 시스템이나 교향곡과 같은 전통 양식, 그리고 역사가 깊은 악기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고, 탈조성 음향과 전자적 악기 등이 이들과 어우러지고 있다.

대중성의 속성은 연주자의 입장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 특히 프로그램의 구성과 악곡의 해석 방향에 동시성과 동일지향성, 파악가능성을 적용할 수 있다. 비슷한 주제나 편성을 가진 작품으로 구성함으로써 동일지향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정전으로 알려진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성함으로써 동시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정전으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더라도 다른 해석이나 편곡을 하는 것 또한 파악가능성을 담보하여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 고전음악의 연주 자체도 사실상 대중성의 실현이 된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대중성


이러한 생각에 도달했을 때, 자연스레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오랜 작업이 떠오른다. 현악 오케스트라라는 편성이 중심을 잡고, 프로그램에 고전음악과 새롭게 작곡된 곡을 고루 배치하며, 잘 알려진 작품을 편성에 맞게 편곡함으로써 다르게 들리게 하는 등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오랫동안 수행해온 작업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연결된다. 미술과 음악이라는 거시적 관점 또한 상반된 가치의 파악가능성과 동일지향성, 그리고 동시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작업은 근본적으로 대중성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올해부터 새롭게 기획한 ‘현장음악2002’ 시리즈에서 이에 대한 의도를 전면에 드러낸 것은 필연적이다. 박상연 예술감독은 “공연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살아있는 음악”이라는 의미로 ‘현장음악’을 주창했다. 그리고 “창작음악을 고전처럼 깊이 있는 울림으로, 고전음악을 창작처럼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한다고 언급하여 동시성을 분명하게 짚었다. 그리고 고전과 창작곡의 프로그래밍을 통해 동일지향성과 파악가능성 또한 확보한다. ‘2002’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미술작품과 연계하여 음악 작품을 위촉하고 초연하는 ‘화음프로젝트’를 시작한 해를 기념한다.

 

새롭게 피어나는 고전


그렇기에 ‘현장음악2002’ 시리즈의 첫 공연으로서 ‘새롭게 피어나는 고전’이라는 주제는 매우 의미심장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다각도의 흥미로운 지점들을 갖는다. 특히 이번 프로그램은 화음평론가의 일원인 음악칼럼니스트 김인겸의 선곡으로, 정전의 반열에 올라선 레스피기의 작품부터 한국 작곡가의 창작곡을 포함하는 대단히 폭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익숙한 고전을 다루는 작곡가의 여러 관점을 볼 수 있고,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음악적 뉘앙스를 들을 수 있다. 즉, 감상자는 익숙함과 낯섦이 배합되고 조화를 이루는 많은 가능성을 경험한다.

첫 곡으로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한 바흐의 양식을 토대로 작곡한 에이토르 빌라-로부스(Heitor Villa-Lobos: 1887-1959)의 <브라질풍의 바흐 제9번>(1945)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바흐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주곡과 푸가의 쌍을 가져왔다. 전주곡은 녹턴의 정서가 연상되는 신비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며, 푸가는 전주곡에서 촉발된 낭만의 서정을 이어간다. 푸가에서는 다이나믹을 더욱 과감하게 설정하여 극적 서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각 성부가 자연스레 극적 특징을 만들도록 둠으로써 전주곡과의 균형이 맞추어지고, 또한 음악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추구한다.

다음 곡은 이은재의 <문묘(文廟)>(2023)로, 성리학의 성지인 문묘에서 받은 인상에서 출발하여 전통음악적 제스처들이 들린다. 어떻게 보면 ‘문묘’라는 제목이 그렇게 연상되도록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버르토크 피치카토에서 거문고가 연상되고, 지속하는 중심음에 호모포닉한 전통관악기가 연결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이 곡이 전통음악의 서양악기로의 투영은 아니다. “나만의 문묘제례악”이라는 작곡가의 말처럼, 전통음악의 선입관을 걷어내고 현재 벌어지는 음향적 사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변함없는 중심음에서 영적 아우라가, 과감한 제스처들에서 지속적 생명력이 전달된다. 그리고 점차 신비하고 복잡한 구성체로 발전하며, 어느덧 홀연히 사라진다. 음악이 끝을 맺지 않듯, 문묘의 정신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어지는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76)의 <단순 교향곡>(1934)은 양식적으로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과 고전 시대의 교향곡 양식을 결합하고 선율과 화음, 표현 등은 현대의 감성으로 채웠다. 그래서 21세의 젊은 나이에 작곡된 초기곡임에도 브리튼의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 되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1악장에서 힘차게 음향의 폭죽을 터뜨리고, 3악장은 풍부한 음향 속에서 낭만적인 불협화음으로 슬픔의 격정을 숨기지 않는다. 4악장은 놀랍도록 일체화된 연주로 대단히 완성도 높은 앙상블을 들려주었다. 2악장은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세 악장의 발췌 연주는 오히려 18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빠르게-느리게-빠르게 구조의 세 악장을 가진 초창기 교향곡 양식에 투영되었다.

후반부의 첫 곡은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의 <현을 위한 소나타 제3번>(1804)으로, 오페라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흔치 않은 이탈리아의 고전 양식 작품이다. 즉, 200여 년 전 이 곡이 작곡되었던 당시의 관점에서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작품이며, 이번 공연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파악가능성을 끌어올린 작품이다. 1악장은 프레이즈의 뉘앙스를 대조시키며 감각적인 극적 표현을 들려주었고, 2악장에서는 비브라토를 섬세하게 제어하며 서정미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3악장은 마치 멤버들이 번갈아 가며 화려하게 독무대를 펼치는 재즈 공연처럼 제1바이올린, 더블베이스, 첼로, 제2바이올린의 수석 연주자들이 이 순서로 솔로 연주를 하는 흥미로운 진행을 들려준다. 솔로를 맡은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각 연주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태껏 앙상블 뒤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실력을 맘껏 뽐냈다. 이렇게 이탈리아 12세 소년의 음악적 재치는 200년 후 한국의 중견 연주자들도 춤추게 했다.

마지막 곡은 16~17세기 곡을 편곡한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의 <옛 춤곡과 아리아 모음곡 3번>(1931)이다. 이 곡은 코랄 세팅이 많아, 앞의 로시니와 달리, 편안하고 차분하며 장중한 느낌도 든다. 이를 위해 활의 무게를 온전히 현에 실으면서 마찰을 최대화하는 등 모든 악기가 역량을 발휘하여 화음을 연주하여, 춤곡의 활기가 넘치는 곡에서도 대단한 무게감을 지녔다. 그런만큼 음향이 풍부하고 색깔이 뚜렷한 현악 앙상블의 정수를 들려주었다.

앙코르는 전반부 마지막 곡으로 연주했던 브리튼의 <단순 교향곡> 중 연주하지 않은 2악장을 연주했다.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이 곡은 마지막까지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새롭게 피어나는 화음


이러한 기획과 연주의 노력에도 관객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사실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만 열리는 연간 약 1,500회 정도 음악회 중에서 관객의 선택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감상자들이 대중성을 지향한 이번 공연의 의도가 공연 전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점은 검토해야 할 점이다. 단순히 홍보의 문제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감상자가 음악회 소식을 듣고, 음악회를 선택하며, 비용을 지불하고, 공연장에 참석하기까지 일련의 사건 속에서 벌어지는 고민, 판단, 결정, 이행의 과정을 더욱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시도해야 한다. 분명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지난 30년 동안의 공연 경험에 그 답이 있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