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영성: 설명 이전에 함께 울리는 세계
안정순
(음악평론가, 음악학박사)
음악의 소멸성과 영성
그림은 캔버스에 남고, 조각은 형태로 고정되고, 건축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음악은 사라지며 존재한다. 비록 음악은 물질적 형상을 갖지 않지만, 물질적 기반 위에 발생한다. 소리의 진동, 연주를 통한 신체적 행위, 악보라는 기록물처럼. 그러나 지각하는 순간 형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음악은 초월과 내면성을 사유하는 데 유리한 장을 제공한다. 그렇다. 음악은 존재 자체가 소멸적이다. 이 소멸성은 음악을 사건으로 만든다. 음은 남지 않지만, 그 음이 울린 순간의 상태는 남는다. 우리는 선율의 정확한 음정을 잊어도, 그때의 공기와 시간의 밀도를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음악은 단지 사라지는 예술이 아니라, 가시성 속에 스며 있는 비가시성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하는 형식이 된다. 영성은 어쩌면 바로 그 주의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
영성과 동시성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을 경험한다. 누군가를 문득 떠올렸는데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거나, 오래전 꿈에서 본 장면이 현실에서 기묘하게 반복되는 경우가 그렇다. 마치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잠시 포개지는 듯한 순간이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은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과 외부 사건이 인과적 연결 없이도 의미 차원에서 만나는 순간을 ‘동시성’(synchronicity)이라 불렀다. 동시성은 원인과 결과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 순간 우리는 세계가 무작위적 연쇄가 아니라, 어떤 의미의 장(field of meaning)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감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동시성과 영성은 경험의 차원에서 맞닿는다. 세계가 나와 단절된 외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그 감각은 종교적 혹은 영적 체험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의 감각은, 의미를 적극적으로 감지하려는 인간의 인지 구조와 맞물리며, 때로는 자기확증편향과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에 놓이기도 한다. ‘의미를 느낀다’는 것과 ‘객관적 연결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좀처럼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음악에서의 영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의 숨은 질서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우리가 시간과 존재를 경험하는 방식을 조용히 바꾸는 일에 더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시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함으로써, 음악 안에서 시간의 초월을 느끼게 한 작곡가다.

신의 시간에 들어간 메시앙: 영원의 현현(顯現)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는 1941년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작곡되었다. 이 작품을 듣고 있으면 종말은 파괴가 아니라 해방에 가깝다. 느린 악장에서 클라리넷은 거의 멈춘 듯한 선율을 길게 끌어올린다. 화성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다. 목적도 해결도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시간이 더 이상 우리를 밀어붙이지 않고 확장된다. 청자는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를 예측하기보다, 지금 울리고 있는 소리 안에 머무르게 된다. 영성은 어쩌면 이 순간에 있다. 무언가를 믿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 메시앙의 음악은 그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의 오르간 작품 《주님의 탄생》(La Nativité du Seigneur, 1936)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성은 긴장과 해소의 드라마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거대한 색채의 덩어리들이 서로 부딪히며 겹쳐진다. 메시앙은 특정 화음을 주황빛과 보랏빛이 겹쳐진 색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화성은 진행이 아니라 발광(發光)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들으면 우리는 ‘이 화음이 어디로 가는가’를 묻지 않게 된다. 대신 그 안에 머물며, 그 빛 속에 서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새소리 작업이다. 피아노곡 《새의 카탈로그》(Catalogue d’oiseaux, 1959)에서 새는 상징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인간의 감정을 투사한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인간이 배우는 순간이다. 메시앙에게 새는 ‘창조의 찬가’였다. 그러나 그 찬가는 장엄하지 않고, 오히려 세밀하고 파편적이며 불규칙하다. 그 불규칙함 속에서 인간은 중심을 잃는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소리를 듣는 몸이 된다. 영성은 여기서 교리나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로 나타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말하는 자에서 듣는 자로.
메시앙의 리듬 역시 독특하다. 그는 ‘비가역 리듬’을 사용했다.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같은 구조. 그러나 이것은 반복이 아니다. 대칭이지만 동일하지 않다. 시간은 되돌아가지만 결코 처음과 같지 않다. 이 리듬 속에서 우리는 직선적 시간 감각을 잃는다. 과거와 미래는 흐릿해지고 현재만이 확장된다. 아마도 메시앙이 말한 영원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메시앙의 음악은 신을 증명하지 않고 교리를 설득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모든 설명의 충동을 멈추게 한다. 듣는 이는 어느 순간, 해석을 포기하고 그냥 듣게 된다. 메시앙의 음악에서 우리는 구원을 약속받지 않는다. 다만 잠시,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풀려난다. 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의 음악은 설명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빛처럼 우리를 감싼다.

침묵 앞에 멈춰 선 패르트: 여백과 절제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의 음악은 시간을 비워낸다. 메시앙이 빛의 덩어리로 영원을 그렸다면, 패르트는 침묵의 가장자리에서 영원을 만진다. 패르트의 음악은 감정을 밀어 올리지 않고 오히려 가라앉힌다. 음은 적고, 화성은 단순하며, 리듬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반복되는 음형은 설명을 거부하고, 선율은 어디에도 달려가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 1978)에서는 피아노의 단순한 삼화음과 현악기의 느린 선율이 끝없이 교차한다.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발전도, 충돌도 없다. 그 대신 청자는 미세한 떨림에 집중하게 된다. 한 음이 끝나고 다음 음이 시작되기까지의 그 미묘한 공간. 영성은 어쩌면 이 공간에서 발생하지 않을까.
패르트는 1960년대 아방가르드 어법을 탐색하던 작곡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침묵으로 들어갔다. 몇 년간 거의 작곡을 멈추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정교회 전례 음악을 탐구했다. 그 침묵 이후 등장한 것이 ‘틴틴나불리’(tintinnabuli) 양식이다. 틴틴나불리는 라틴어 ‘작은 종’에서 온 말이다. 하나의 성부는 선율을, 다른 성부는 삼화음 음들만을 반복한다. 음악은 확장되지 않고, 맑은 울림 속에 머문다. 패르트의 음악은 무언가를 덧붙이는 대신,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메시앙이 시간의 밀도를 통해 초월적 순간을 구현했다면, 패르트는 시간의 절제를 통해 이를 구현한다. 메시앙이 색채의 ‘충만’으로, 패르트는 ‘비움’으로 초월을 감지하게 한다. 두 작곡가는 모두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들의 음악이 영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교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의 구조 때문이다. 메시앙은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조직했고, 패르트는 음을 극도로 제한했다. 특히 《형제들》(Fratres, 1977)에서 드러나는 반복 구조는 흥미롭다. 같은 화성 진행이 여러 차례 되풀이되지만, 그 사이를 가르는 리듬과 음역은 조금씩 달라진다. 변화는 극적이지 않고, 대신 우리는 ‘같음 속의 다름’을 감지한다. 이때 음악은 기대와 긴장의 게임이 아니라, 집중하는 행위가 된다.
패르트의 음악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 단순성은 공허가 아니라, 오히려 과잉의 시대에 대한 하나의 응답처럼 들린다. 끊임없이 말하고, 이미지가 넘쳐나는 세계 속에서 그의 음악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우리를 멈추게 한다. 메시앙이 그 사라짐을 빛으로 채웠다면, 패르트는 그 사라짐을 투명하게 남겨 둔다. 소리는 울리고, 사라지고, 다시 울린다. 남는 것은 음이 아니라 상태다. 메시앙이 우리를 시간의 두께 속으로 이끌었다면, 패르트는 우리를 시간의 여백 속으로 이끈다. 한쪽은 빛으로, 다른 한쪽은 침묵으로.
공명의 순간
메시앙과 패르트의 전략은 다르지만, 두 작곡가의 음악은 모두 청자를 ‘설명하는 자’에서 ‘경험하는 자’로 이동시킨다. 이들의 음악은 이러한 경험을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시간은 되돌아가지만 동일하게 회귀하지 않는다. 직선적 인과의 시간 대신, 겹쳐짐과 비워짐이라는 시간의 감각이 형성된다. 이것은 일종의 음악적 동시성이다. 인과적 연결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과 의미가 한 순간에 겹쳐지는 구조다.
음악은 형상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사라지는 순간, 우리 안에서 하나의 상태를 남긴다. 그리고 그 상태가 외부 세계의 장면이나 기억과 겹칠 때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정확한 공명을 경험한다. 이 공명은 인과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각의 구조를 흔든다. 음악에서 영성이란 시간과 의미가 겹쳐지며 청자의 존재 방식이 일시적으로 변형되는 사건의 이름이다. 아마도 음악과 영성이 만나는 자리는 바로 이 지점, 세계가 설명되기 전에, 이미 함께 울리고 있는 자리가 아닐까. [畵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