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과 감창열, 영혼으로 만나는 예술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 웹진 『통로』 편집장)
영적 음악
“음악은 소리이고, 소리는 본질상 비영구적이다.” 저명한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 본문 첫 페이지에 수록된 문구다. 음악의 정의이자 특징인 이 명제에 도전하는 시도들이 20세기 후반 이후로 꾸준히 있었다. 예를 들면, 거의 들리지 않게 연주하거나, 심지어 전혀 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소리’라는 속성에 도전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청취를 위해 매우 집중해야 하거나, 혹은 청취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또한 한 음을 길게 연주하거나, 심지어 음악 작품 전체 길이가 수 시간이 넘도록 오래 연주함으로써 마치 영구적 음악으로 인식시키기도 한다. 음조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거나 반복이 많은 경우도 그러한데, 처음을 잊고 끝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악을 그 경계로 끌고 가거나 혹은 이를 넘으려고 시도하는 작품들은 청각적, 감성적, 시간적 특징이 일상의 범위 밖에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음악에는 ‘내면적’, ‘정신적’, ‘종교적’ 등 물질세계를 벗어나는 표현들이 사용되곤 한다. 그리고 ‘영원’, ‘무한’과 같은 초월성을 지닌 단어들이 사용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 표현들의 의미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예측하고 육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현실을 초월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곧 영성에 대한 지향으로 연결되며, 그래서 이러한 음악을 ‘영적 음악’(spiritual music)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적 음악’이라는 용어는 그로브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Richard Taruskin: 1945-2022)은 그의 대표적 저서인 『옥스포드 서양음악사』 시리즈(2005)를 구성하는 여섯 권의 책에서 ‘영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음악에서의 영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정의하거나 설명하지 않았지만, 19세기까지의 음악에는 주로 종교 음악이나 영가(靈歌)의 의미로 사용했으나. 20세기 후반에는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은 작품에 대한 설명에 집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음악이 영적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특징이 20세기 후반에 급격히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20세기에서의 영적인 음악의 특징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1935)에 대해 설명하면서 “긴 음조”(long tone)는 호흡을 제어하기 때문에 영적 특성을 나타내는 요소로 보았고, 또한 “미니멀리즘 작곡 기법”(minimalist techniques)은 수동적인 영적 명상의 상태를 유도하기 때문에 영적 특성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타루스킨은 작곡 의도뿐만 아니라 음악적 특징이 감상자로부터 영적 수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타루스킨은 여기에 덧붙여, 미니멀리즘이 영적 특성을 갖는 이유로 철저한 축소가 영적 충만과 관련이 있다는 종교적 믿음이 고대부터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1960~70년대에 급진적으로 축소하는 양식을 사용했던 미니멀리즘 작곡가들은 종교를 갖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자신의 음악적 탐구를 영적 탐구와 동일하다고 보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중반부터 라 몬테 영과 테리 라일리(Terry Riley: *1935)는 요가 명상을 수행했고,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1937)는 티베트 불교의 열성 신자였으며, 스티브 라이시(Steve Reich: *1936)는 1970년대부터 유대교에 귀의했다.
단색화
이러한 음악에서의 영적 특성을 살펴보면서, 머릿속에서 한국의 단색화(單色畵)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하나의 선을 길게 흘러내리는 박서보(1931-2023), 이우환(*1936)과 반복으로 구성되는 김환기(1913-1974), 이건용(*1942)의 작품들은 타루스킨이 말한 영적 작품의 청각적 특징을 시각적으로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심지어 이들의 작품이 넓은 범위의 미니멀리즘 기법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구조를 중시하는 서양의 미니멀리즘의 지향점과는 달리, 행위를 통한 수행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기에 더욱 영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단색화를 보면 영적 감흥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러한 단색화가 등장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동인을 만들지도 않고 모임을 가진 것도 아니며 서로 상의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그들은 신체의 움직임, 단일한 색상, 붓의 질감이 살아있는 점과 선이라는 근본적인 모습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시대적 이치가 분명하다. 복잡해지고 물질화되며 기능화되어가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손길은 그들을 함께 이끌었다. 작곡가 한스 첸더(Hans Zender: 1936-2019)가 음악이 영적이기 위해서는 감정이나 기능을 추구하지 말고 자연의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리고 이러한 영적 예술은 물질 중심과 오락 중심으로 쏠려있는 대중 사회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예술가의 노력이라는 그의 주장은 단색화에 딱 들어맞는다.
그렇기에 단색화는 그 세대의 정신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무거워 보이는 어두운색으로 가득한 윤형근(1928-2007)과 물방울로 캔버스를 채운 김창열(1929-2021)는 단색화를 확장시킨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윤형근, 고통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다
윤형근(1928-2007)의 그림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뭘까? 짙게 우린 보이차의 색상이 계속 진해진다면 이 금에 칠해진 청다색(靑茶色)과 가까워질 것 같다. 쓰디쓴 그 미각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미각은 나의 마음에 파고들어 가장 어울릴 것 같은 기억을 끄집어낸다. 잊고 싶은, 그럴수록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며 더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그런 쓰디쓴 기억.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청다색의 기둥, 혹은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청다색의 벽. 나의 정신에 미동을 일으키는 하나의 색깔, 그리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 계속 이어져 있을 것 같은 영원한 존재. 하지만 어느 순간 공포스러운 위압감이 아닌 포근한 위로를 준다. 땅의 색을 하고 있는 기둥과 벽은 어느덧 세상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땅처럼 나의 고통스런 마음도 그림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 빛나는 빛은 어떤 희망도 없을 것 같은 현실에서 갈 길을 보여준다. 그 빛은 희망은 아니다. 희망은 거짓이며 고문일 뿐이다. 한 알의 밀알은 희망일 수 있으나, 지금의 나를 구해주지 못한다. 한 줄기 빛은 희망일 수 있으나, 지금 나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 희망을 얘기하지 말자. 그저 막혀있지 않고, 멈춰 서 있지 않고, 그저 어디론가 갈 길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모진 삶을 살아온 그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까? 이념의 시대에서 벌어진 순수했던 과거의 악의적 곡해, 그리고 억울한 오해와 누명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 그를 구해준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이끄는 앞에 놓인 길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림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부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나 보다.
김창열, 물방울에 신을 담다
같은 세대인 김창열(1929-2021)도 시대의 고초를 피하지 못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은 이념에 대한 오해에 오해를 낳았고, 그러한 삶은 그를 더욱 그림에 머물게 했고 몰두하게 했다. 그는 외국에서도 전시회를 갖기도 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운명은 갈 길을 알려줬다. 우연히 바라본 캔버스 뒷면에 맺힌 물방울. 물방울이 걸어온 말을 그는 외면하지 않았고, 이에 응답했다.
황색 바탕에 그린 물방울들, 그는 분명 물방울을 그렸고 감상자들도 그의 그림에서 물방울을 본다. 하지만 물방울 안에는 밝음과 어둠을 가로지르는 단색의 흐름이 있다. 밝음과 어둠, 이 상반된 둘이 하나의 테두리에 묶였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빌어 말했던 아프락사스(Abraxas)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모든 것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선뿐만 아니라 악, 밝음뿐만 아니라 어둠도 신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신은 이 둘을 함께 품고 있다. 아프락사스는 바로 그러한 존재다. 이렇게 물방울 하나에서 신을 만난다. 사실 물방울에는 밝음과 어둠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모든 것이 존재하니, 아프락사스 이상이다. 그래서 그 원 안에는 ‘무한’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한의 반복은 영원에 이른다. 크기가 정해진 캔버스에 한정된 수의 물방울을 그릴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반복되면서 영원으로 확장되고, 우주를 만나게 된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삶으로 보면 어떨까? 물방울 하나에는 각자의 삶이 들어있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시간과 앞에 놓인 삶은 언제나 어둡지만, 등 뒤는 이보다 밝지 않을까? 그 밝은 빛에서 다시금 갈 길을 찾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에 놓인 길을 가는 것이 즐거움일 수도 있다. 이렇게 김창열의 물방울 하나에는 각자의 밝음과 어둠, 그리고 각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다. 그러한 물방울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이루듯, 각자의 삶이 모여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음악과 미술이 만나기까지
시간 예술인 음악과 공간 예술인 미술은 완전히 반대편에 있지만, 이렇게 영원성과 무한성을 통한 영적 가치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한 곳에서 만난다. 오늘날 벌어지는 장르의 혼합, 융합, 공존과 같은 합일은 이러한 영적 가치의 추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종합예술 혹은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관념이 발생했던 19세기에 예술종교의 개념이 같이 싹튼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총체예술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바그너가 생의 마지막에 종교적으로 변모하여 《파르지팔》에 ‘무대를 위한 신성한 축전극’(Bühnenweihfestspiel)이라고 쓰고 전체 속도를 ‘매우 느리게’(Sehr langsam)로 지정한 것이나, 총체예술은 아니더라도 《배 모양의 세 개의 소품》과 같이 시각적 관념으로 음악을 만든 에릭 사티가 ‘장미십자회’라는 종교를 창안한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감각으로 느낀 영성을 풀어내는 방법이 종교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지금은 다양한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다. 특징적인 소리로, 시각적 표현으로, 등등. 이러한 작업을 30년 이상 한결같이 지속하고 있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가야 할 길일 수 있다. 아니, 가게 될 길이고, 이미 그 길로 가고 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의 공연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단지 검은 공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畵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