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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로 vol. 1] 백남준의 감각 체계
임야비 / 2026-03-01 / HIT : 295

백남준의 감각 체계

 

임야비

(소설가, 극작가, 총체극단 ‘여집합’ 단장)

 

 

  분류된 예술과 감각. 실수(real number)의 세계

 

  우리는 예술을 분류한다. 음악, 미술, 무용, 연극, 건축, 문학, 사진, 영화 등등으로. 감각도 다섯으로 나뉘어 오감이 되었다. 예술 자체가 정의가 모호한데, 그 하위 개념을 나누다 보니 장르 논란은 끝이 없고 의미까지 없어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 더 나아가, 왜 분류하려 할까? 

 

  답은 간단하다. 예술을 길어야 수명이 백 년도 안 되는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디 경계 긋기를 좋아한다. 그게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나와 남, 아군과 적군, 봄과 여름, 자국과 타국, 시각과 청각. 분류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큰 것과 작은 것, 비싼 것과 싼 것, 깨끗한 것과 지저분한 것, 오래된 것과 새것,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차이는 필연적으로 평가와 계급을 만든다. 합쳐보면, 예술 분류는 유한한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인간, 분류 안에서 안전을 영유하고픈 인간 때문에 생긴 일종의 구역이자 좌표다.

 

  이를 수학에 빗대면 실수(實數), 즉 셀 수 있는 수, 현실의 수, 영어로 real number​’다. 실수는 또 유리수와 무리수로 나뉘며, 두 실수는 명확한 순서가 있으며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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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실수는 위 수평선에 순서대로 찍혀있고, 우리도 그리고 우리의 세계도 저 직선 위에 존재한다. 셀 수 있고, 분류 가능하고, 크기 비교를 할 수 있는 세상에 예술도, 예술의 분류도 깃발을 꽂는다. 길어야 백 년이다. 하나에만 집중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렇게 화가는 그림만 그리고, 음악가는 소리만 내야 하며, 무용가는 춤만 추고, 소설가는 글로 먹고산다.



  . 백남준의 수(數) 

 

   백남준의 작품은 미술, 시각 예술로 분류된다. 전시회라는 이름으로 갤러리나 뮤지엄에서 열리지,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극장에서 열리지 않는다. 그의 전위적 행위 예술도 마찬가지다. 근사한 비엔날레에서 관람할 수 있지만 연극제나 무용제에 초대받진 못한다.

 

  여기서 백남준의 음악적 요소 -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일제치하 친일파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나 집에 어렸을 때 피아노와 전축이 있었던 성장 배경과 동경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관한 논문을 썼고, 독일에서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의 실험 음악을 시도했다는 점, 아방가르드 음악가 존 케이지에게 영향받았고, 1959년 도끼로 피아노를 박살 내고, 1963년 TV를 악기처럼 활용한 ‘음악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발표하고, 전위 예술 운동인 플럭서스에서 시각, 청각, 움직임을 통합한 ‘총체 예술’을 시도했다는 모두가 알고 있고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실수(實數)로 표현된 백남준이다. 백남준은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다. 그는 실수와 허수가 엉긴 복소평면(複素平面; Complex plane)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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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모든 별의 공간이 허수의 세계다. 우리의 좁은 수평선 밖에는 제곱해서 음수가 되는 꺼림칙한 세상이 있었다. 백 년도 못 산 백남준은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다. 셀 수 없는 허수는 분류할 수 없고,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 즉, 무리 지어 울타리를 만들거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백남준을 실수의 수평선으로 억지로 욱여넣는 순간 우리는 그를 저차원으로 패대기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뭐 뭐’, ‘뭐 뭐의 너머’, ‘미술과 음악의 융합’, ‘다원(多原) 장르’, ‘규정할 수 없음’, ‘낯설게 하기’, ‘시각과 청각의 미끄러짐’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복소평면에 있던 백남준에겐 우리가 말하는 오감은 적출된 감각이자, 분류된 예술의 장르였다. 실수의 수평선 위에 있던 우리가 우주의 별을 보며 느꼈던 공감각이 백남준에겐 원(原)감각이었다. 즉, 그의 작품들은 실수의 수평선 위에 흩어져 박혀있던 미술, 음악, 행위, 기술을 융합한 것이 아니라, 복소평면의 원감각을 복원한 것이다. 백남준에게 감각은 하나였고 그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여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허수가 말한다.

 

  쾌(快)와 불쾌(不快)는 개인적 판단이라 수로 세서 비교하면 ‘교양 없다’라는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자신만이 셈할 수 있는 잣대가 있지 않은가? 남에게 속물처럼 보일까 봐 꼭꼭 숨겨놓은 실수의 수평선. 친구가 단원으로 있는 오케스트라보다 베를린필의 소리가 훨씬 좋다는 걸 재고, 단색화와 마크 로스코의 작품 가격을 평가하며, 유행을 따라 명품 로고가 박힌 비싼 스웨터를 탐하는 것처럼 말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경험했을 때 그리고 소변기를 엎어 놓은 마르셸 뒤샹의 작품을 접할 때의 당혹감은 머릿속에 숨겨놓은 눈금 박힌 수평선마저 박살을 내버렸다. 분류할 수 없고 고저와 장단을 비교할 수 없는 허수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백 년 남짓 사는 인간은 분류된 수직선 안에서 안온하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허수와 복소수를 수의 가장 큰 체계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수학자들의 거부감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1960년대 초, 실수의 수평선으로 수선의 발을 내린 백남준의 두각을 바라보는 시각도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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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그림에서 실수를 나타낸 수평선의 여집합 즉, 나머지 공간에 가득한 별들이 허수다. 실수가 보기에 허수는 허무맹랑하지만, 허수가 보기엔 실수는 이상하고 편협하며 오만한 집합이다. 허수들이 실수를 내려보며 말할 것이다. ‘쟤네는 셀 수 있데? 어떤 게 높고, 어떤 게 낮은지 비교할 수 있다는데?’, ‘장르라는 집합으로 무리 지을 수도 있는데 잘 안되나 봐.’, ‘그걸 세는 애들이 백 년도 못 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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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Cello (1965) (Charlotte Moorman & Nam June Paik)

Prepared Pianos (1963)​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Performance of Etude for Pianoforte (1965) (공연 중 백남준이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있다.)​​​

TV Bed (1972)​ (Charlotte Moorman & Nam June Paik)​

 

  백남준이 남긴 말에 허수의 주석을 달아본다.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을 포기한 순간부터 굉장히 자유로웠다.”

 

  허수는 크기도 경계도 없어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실수와 달리 허수 사이에는 부등호가 없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백남준에게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데 본래 내가 테크닉이 없으니까. 피아노도 못 치고, 작곡도 못 하고, 그림도 못 그리고 하니깐 이것저것 해보는 거예요.” 

 

  백남준에게는 원래 하나였던 것을 나눠 놓은 우리가 이상했을 것이다. 그는 새롭게 나타난 융합자가 아니라 원래의 것을 드러낸 복원자다.

 

  “2032년에 내가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만 살이 될 것이다.” 

 

  백남준은 실수 수평 선상 2006년 1월 29일 향년 73세에 본디의 세계로 돌아갔다. 셀 수 있는 수명 따위가 허수인 백남준을 가늠하거나 담을 수 없다. 

 

  “이것이 음악인가? 글쎄, 음악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허수가 수인가? 글쎄, 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예술을 하는 거지요.” 

 

  복소수의 관점에선 제곱하면 무조건 양수가 되는 실수의 일직선은 무척 재미없고 싱거울 것이다. 역지사지해 보자. 4원수, 8원수, 16원수 같은 하이퍼컴플렉스 수(hypercomplex numbers)는 복소수를 포함하는 개념인데, 4차원, 8차원, 16차원의 체계 안에서는 복소평면은 거의 맹물에 가깝다. 백남준이 이 차원 체계를 알았다면, 짭짤한 맛을 찾아 더 멀리 나갔을지도 모른다.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 

 

  그에게 일렬로 빽빽이 줄 세운 실수의 선은 비좁고 답답했다. 복소평면이 백남준의 놀이터였다. 그는 거침없이 TV 모니터에 빛을 밝혔고, 이제 우리는 모두 백남준의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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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re The Better 다다익선(多多益善) (1988)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

 

 

  당신의 감각 체계

 

  가까운 미래, 당신이 연주회장에서 음악을 들을 때, 한 연주자가 벌떡 일어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춘다. 당황하거나 감탄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음악, 미술, 무용, 연극의 벽을 허무는 파격이 아니다. 융합적 공감각을 향한 가상한 용기도 아니다. 단지 원감각의 복원이다. 아마도 그 맛은 매우 짭짤할 것이다.

 

  도미노처럼 당신 등으로 쓰러질 뒤 수(數)에 쫓기지 말고, 당신이 넘어져 쓰러뜨릴 앞 수(數)를 의식하지 말자. 그래야 수평선을 둘러싼 위아래 허수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미처 감응하지 못했던 세계다. 바로 그곳에 백남준의 작품이 존재한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 같은 남준의 TV 모니터 속. 거칠 것 없는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