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머무는 삶의 자리
서주원
(음악평론가, 음악학박사)
소설 같은 일상
그날은 봄의 클라이맥스였다. 거리에 벚꽃이 만개했다. 지나던 발걸음들이 탄성과 함께 자꾸만 느려졌다. 이제 막 핀 꽃잎들은 센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작과 동시에 끝나가는 한순간의 축제였다. 신촌 대학로 통창이 있는 까페 3층에 올라 거리를 내려다봤다. 꽃만큼 싱그러운 젊음이 가득했다. 눈부신 거리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한 중년 남자였다. 형광 연두색 복장의 환경미화원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쓰레기를 치우다 문득 눈을 들었다. 이내 검정 장갑을 뒷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 가만히 꽃을 보았다. 곧 고요가 그를 감쌌다. 그가 머무는 시공간에 신비와 경이가 깃들었다. 그는 잠시, 하염없이 서있었다. 눈빛이 먼 곳을 응시하듯 아득했다. 얼마 후 그 순간을 사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일순 정지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 봄의 가장 예술적 순간이었다. 그는 꽃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는 꽃에서 그에게로 향했다. 통창 밖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만약 영화였다면 이때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퍼져나갈 것이다. 음표들이 가볍게 흩날리는 라흐마니노프의 ‘라일락’(Op. 21 No. 5) 같은 선율이. 이 곡은 러시아 시인 예카테리나 베케토바의 시에 붙인 가곡이다. 시적 화자는 이른 새벽 산책길에 라일락을 찾아 간다. 삶에 주어진 진정한 행복이 바로 라일락에 있기 때문이다. 유독 길고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지나 봄에 피어나는 라일락은 더욱 각별할 것이다. 아스라한 피아노 선율은 흐드러진 라일락의 향기를 퍼뜨리는 듯하다. 여기서는 가사 빠진 피아노 편곡이 더 좋겠다.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연주회의 앙코르 곡으로 즐겨 쳤다고 한다. 그에게 라일락과 연관된 소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익명의 팬이 그가 해외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10년 가까이 매번 흰 라일락 꽃다발을 보낸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사람들이 말이 안 되는 거짓을 소설 같다고 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실화인데도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 “있을 수밖에 없는 일처럼 진실한데 아름답기까지 한 이야기를 소설 같다.”라고 했다. 우리 일상에서도 소설 같은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뿐인가. 시적이다·극적이다·영화 같다·작품 같다는 표현도 일상 여러 순간에 사용된다. 일상의 틈새로 예술적 순간이 스며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연주회장이나 미술관 같은 장소만이 아니라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처음 읽는 것도 아니었고, 크게 감명 받았던 작품도 아니었다. 한데 달리는 지하철의 리듬과 속도가 감동을 증폭시켰을까?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 속에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이후 내게는 소설 자체보다 그 상황이 더 소설 같이 남았다. 문학을 통해 공적 장소와 내면의 처소가 급작스럽게 결합한 그 순간이.

침묵을 듣는 음악회
음악회에는 응당 음악을 들으러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회는 침묵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청중은 소리를 멈춤으로써 소리가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연주회장은 일상의 공간과 분리된 곳으로 외부 소음을 차단한다. 그런데 도시 소음 중 큰 부분이 사람의 소리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비로소 고요한 장소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둘러보니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촘촘히 자리에 앉아있다. 무대가 밝아지고 객석이 어두워지면 소곤거리는 소리조차 즉시 사라진다. 청중은 무대에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제 음악은 이 침묵 위에 놓인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침묵은 연주회 후의 침묵과는 완전히 다르다. 연주회 중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연주회 후 여운을 음미하는 침묵에도 음악이 들어있다. 그러나 연주회 전의 침묵은 의도적으로 소리의 독특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청중들의 연주다. 다정한 침묵이 감도는 연주회는 음악을 위한 너른 장소가 된다.
때로는 메마른 침묵도 있다. 한 연주회를 잊을 수 없다. 그날의 연주자는 청중의 소음에 극히 예민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 예민함은 음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청중은 바로 그렇게 그가 갈고닦은 음을 들으러 모인다. 마땅히 청중은 소란해서는 안 되고, 완벽주의 연주자의 까다로움과 섬세함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유난했다. “연주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관람 수칙을 안내드립니다. 만에 하나 공연이 중단되는 불상사가 없도록 적극 협조 부탁드립니다.” 연주회 전에 핸드폰 전원 종료나 악장 사이 박수 금지 등 관람예절을 방송하는 것은 흔하지만, “강력한 요청”, “공연이 중단되는 불상사”가 들어간 안내는 처음이었다. 연주를 기다리는 청중들의 침묵에 불안감과 긴장감이 더해졌다. 실황 연주지만 진공 상태를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았다. 점점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고, 옆 사람의 작은 기척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모두 푹신한 좌석에 비싼 가격을 주고 앉았지만 옴짝달싹 못했다. 음악을 위한 자리는 있었지만 나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느꼈다. 혼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 연주회 후에 비슷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 같은 음악
침묵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또한 말이 빠질 때 음악은 얼마나 더 많은 말을 걸어오는가. “음악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렇지만 침묵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낭만주의 작곡가 멘델스존은 가사 없는 노래(Songs without Words)라는 의미를 가진 ‘무언가’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었다. 각각 특정한 분위기나 정서를 표현한 무언 음악은 모두 피아노 소품 48개로 한 권의 책을 이룬다. ‘이중창’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Op. 38 No. 6)은 4페이지에 걸친 연인 간 밀어다. 차마 말이 되지 못하는 감정을 두 사람은 애절하게 주고받는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낭만주의 작곡가 쇼팽은 밤의 정취와 감상을 담은 녹턴을 작곡했다. 녹턴 역시 그 기원이 가사 없는 노래다. 미국의 음악 평론가 헨리 핀크는 쇼팽에 대한 에세이에서 녹턴의 드라마적 특성에 주목했다. 그중 <녹턴 7번 C#단조>(Op. 27 No. 1)에 대해서는 “4페이지 악보에 400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대중적 오페라보다 더 다양한 감정과 진정한 드라마 정신이 담겨있다.”라고 평했다. 응축된 음표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내는 이들에게 녹턴은 비밀스러운 오페라가 된다.
소설이나 시에 기대고 있는 음악들도 있다. 드뷔시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 받아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작곡했다. 시는 목신이 관능적 환상에 빠져드는 장면을 묘사했는데, 드뷔시는 반음계를 자유롭게 사용해 꿈과 현실을 오가는 순간을 몽환적으로 표현했다.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쇼숑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 Op. 25>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 얽힌 투르게네프의 소설 『사랑의 찬가』를 배경으로 한다. ‘시곡’(詩曲)이라고도 칭하는 이 곡은 드뷔시의 곡처럼 이야기 전개보다 음악 자체가 만들어내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집중하게 한다. 리스트는 100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대서사시인 단테의 『신곡』을 기반으로 피아노곡 <단테를 읽고>와 <단테 교향곡>등 두 작품을 썼다. 문학과 연관된 음악을 감상할 때 책의 내용을 구절구절 아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음악은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해석의 열쇠는 작품 안에 있지만 감상자도 해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작곡가의 삶이 작품 해석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 b단조 ‘비창’>이 대표적이다.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며 삶과 작품에 대한 의욕이 넘쳤던 차이콥스키는 1893년 ‘비창’의 초연 후 9일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작품은 그대로 음악적 유서처럼 읽혔다. 초연 때 그가 직접 지휘했으나, 두 번째 연주는 그를 위한 추모 연주회에서 울렸다. 전례 없이 처절하고도 비통하게 마치는 이 곡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작품에 담긴 비밀스러운 의미에 관해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다. 제1악장에 쓰인 두 개의 주제는 아래로 가라앉는 선율을 기반으로 하며 층층이 슬픔의 정서를 강화한다. 여린 악상으로만 이루어진 부분에는 pppppp라는 극히 이례적인 셈여림이 쓰여 음악은 소리와 소멸의 경계에 위태롭게 놓여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비애는 1876년에 쓴 피아노 모음곡 <사계, Op. 37a> 중 ‘10월, 가을노래’의 마지막에도 서려있다. 곡에는 러시아 시인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가을’의 첫 두 구절이 있다. “가을, 우리의 뜰은 가련히 스러져가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은 바람에 흩날리네.” 우수에 젖은 이 곡은 가녀린 한숨 속에서 pppp로 마친다. 삶의 덧없음과 취약성을 극히 민감한 정신으로 포착해내는 이러한 작품들은 인생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소설이 놓이는 자리
셈여림에서 p는 ‘여리게’를 의미한다. pp는 ‘매우 여리게’다.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다. ppp에서는 머뭇거리게 되고, pppp부터는 차라리 말을 삼키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 어려운 그것들을 속에서부터 기어이 밖으로 밀어낸다. 고독, 고통,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섬세하고도 처절하게 세계의 지평을 넓혀간다. 소설가 한강이 그러하다. 그녀는 ppp에서 시작한다.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귀 기울이게 한다. 5월의 광주와 4·3의 제주에서 길어낸 그녀의 문장에 세계가 숨죽였다. 또 다른 책에서는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야수가 아닌 나무가 되는 것을 택한다. 거창한 주제와 기발한 상상만이 주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 생길 법한 미묘한 균열, 거기에서 파생되는 감정에도 깊이 파고든다.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냘프게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움직임”에 시선을 주고, 상실과 상처 앞에서 “어디까지 왔나”,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마음을 모은다. 표현할 길 없어 덮어두었던 마음의 미세한 결을 조심스레 보듬는다. 그렇게 그녀의 말들은 읽는 이의 마음 한편에 고요히 자리한다. 소설 ‘노랑무늬영원’의 화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창가에 서서 “소리 없이 몸을 뒤집고 있”는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소설은 이렇게 마친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 있다. 말없이.”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