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서툰 솜씨를 걱정하며 주말을 보냈는데,
연구실 문을 여는 순간
국화향기와 노란 빛깔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2008년 가을 햇살이
순간의 견고한 알갱이들을 비추고 있다.
임지선 - 작곡노트
‘마찰’은 실처럼 가는 금속(스테인레스 스틸)이 불규칙적으로 얽혀있는 상태로 전시장 바닥에 깔리는 작품이다. 공간화랑의 건축적 구조 내에서 없는 듯 존재하는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입던 옷을 빨아서 입는 느낌’처럼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로 공간을 체험하게 한다.
‘마찰’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으로 두 물체가 서로 닿은 상태를 의미한다. ‘마찰’에 해당하는한자는 ‘문지를 마(摩)’와 ‘문지를 찰(擦)’ 인데, 문지른다는 의미를 중복해서 사용함으로써 감각적인 요소를 강조한 느낌을 준다. ‘마찰’에서 관객의 발이 작품에 ‘닿는다’는 물리적인 상황은 관객과 작품의 공존을 전제하고 있다. 관객은 작품과 맞닿아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됨으로써 작품과 관객 간의 이격(離隔)이 존재하지 않는, 가장 내밀한 환경에서 관객이 작품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마찰’이라는 단어는 의견이나 견해가 다른 주체간의 충돌을 가리키는 추상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대상간의 ‘닿음’은 내밀한 감각적 체험의 차원에서 벗어나 갈등과 충돌의 부정적인 분위기로 접어들게 된다. 작품의 소재는 ‘마찰’이라는 단어의 중의적 속성을 적절하게 구현하고 있다. 즉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는 이 작품의 실체는 매우 정밀하게 절개된 금속인데, 절개의 정도가 더해져 날카로운 상태의 금속면을 부드러운 촉감의 표면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부드러움과 금속으로서의 경성(傾性)의 조화는 잘 떨어지지 않는 어떤 얼룩 같은 것을 일거에 제거하는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역설적인 조화와 중의적 의미를 통해서 박기원은 어떤 독특한 분위기 속에 구체적인 표현을 더했다. 공간의 속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형성된 표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박기원은 매우 조용하고 내밀한 방법으로 온갖 종류의 마찰들을 슬며시 불러들인 것이다.
<전시도록 서문: 닿음과 부딪힘, 그 사이 어딘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