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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현의 울림'(Sonorty of Strings) 리뷰: 음악이 던지는 질문
노승림 / 2025-11-16 / HIT : 151

화음챔버오케스트라 '현의 울림'(Sonorty of Strings)

2025년 10월 20일(월) 19:30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콘솔레이션홀

 

음악이 던지는 질문

노승림

(음악칼럼니스트, 숙명여대 교수​)

 

 

  현악기 앙상블은 단순한 음향의 집합체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사회적 관계를 소리로 구현하는 하나의 철학적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음역의 현악기들이 함께 울릴 때, 각각의 악기는 독립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전체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은 각 개인이 고유의 목소리를 지니면서도 공동체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인간 사회와 흡사하다.

 

  10월 20일 저녁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연주된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현의 울림>은 다양한 시공간 안에서 한 개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개인이 서 있는 지점과 바라보는 세상은 물론 저마다 다르게 설정되었고, 그로 인한 고민의 색깔도, 해결책도, 도달하는 지점도 모두 달랐다. 정체성에 대한 이렇듯 다차원적인 접근은 개인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첫 곡 바스크스의 교향곡 1번 <목소리>는 격변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작곡된 작품이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발트 3국은 1989년 ‘발트의 길’이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체제로부터 독립의 의지를 가장 빠르게 표한 나라들이었다. 이 시위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간 사슬을 만들며 소련의 무력 점령에 대한 비판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뜻이 같지는 않았다. 라트비아 내에서는 독립을 추구하는 개혁 세력과 친소련 세력 사이에 내부 갈등이 극대화되었다. 1991년 수도 리가에서는 소련군에 대항하고자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소련의 유혈 탄압으로 이어졌다.

 

  이런 사회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바스크스는 어떤 심경으로 이 작품을 써내려 갔을까? 밖에서 불어오는 풍랑이 거칠수록 그의 시선은 더욱 깊숙이 내면을 파고들었다. 제1악장에서 현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율은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이끌었다. 때때로 일어나는 미세한 불협화음이 아슬아슬한 불안을 조성했지만 긴 호흡으로 침묵을 호소한다. 그렇게 서서히 확장되는 음악은 정치적 올바름이나 편견을 넘어선 신비로운 영혼의 목소리를 불러들였다.

 

  약동하는 제2악장은 이전 악장과 여러모로 대조를 이루었다. 현악기들의 역동적인 선율은 우리를 명상으로부터 깨워 세속으로 인도했다. 반복적인 리듬과 갈수록 올라가는 낙천적인 선율은 그러나 어두운 단조를 품으며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인생의 복잡다단한 양면성을 드러냈다. 마지막 악장은 강렬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불협화음과 격동적인 울림으로 가득하다. 전쟁과 파괴는 어느 한쪽만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양심의 목소리는 꽤나 직접적이고 극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교향곡은 다시 1악장의 침묵의 목소리로 돌아와 마무리되었다. 내면의 화해와 용서를 1악장의 반복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당히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토록 성취하기 힘들어 보이는 그 내면의 평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처음 비롯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차이콥스키의 페초 카프리치오소는 전체 프로그램의 대담한 반전처럼 자리했다. 화려한 기교와 비정형 리듬의 반복은 전형적인 카프리치오소의 이미지를 벗어나, 이번 무대에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가 서로를 시험하는 연주로 전개되었다. 독주자의 활은 날카로움과 우아함 사이를 오가며, 비통한 선율이 번쩍이는 순간마다 청중들은 숨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본질적인 매력은 기교에 머무르지 않았다. 바스크스 곡과 달리 이 곡은 지극히 사적인 계기에서 비롯됐다. 차이콥스키는 여행 중에 친구 니콜라이 콘드라티에프가 매독의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여정을 중단하고 친구가 머무는 아헨으로 찾아갔다. 그곳에 한 달 넘게 머무르며 차이콥스키는 정신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지켜봤고 결국 임종까지 지켰다. 이 긴 시간은 작곡가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넘어 죽음을 사색하는 계기가 되었던 듯싶다. 솔리스트의 현란한 기교는 여느 비르투오소 작품들이 그렇듯 현란한 외적 과시가 아닌,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폭주하는 인간의 뜨거운 열정을 떠올리게 했다. 솔리스트와 앙상블의 유기적인 대화. 그리고 리듬이 쌓아가는 운율은 음악의 서사로 연결되어 환희와 불안 사이를 오갔으며, 결국 기교적 화려함을 훌쩍 넘어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었다. 

 

  2부 첫 곡으로 연주된 박영희의 <석양의 빛>은 이날 프로그램 가운데 유일하게 서사를 품지 않은 작품으로, 한 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왔다. 느리고 잔잔하게 시작된 음악은 점차 확장되어 저녁 노을이 수평선에 닿는 순간의 정적과 여운을 청각적으로 재현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음향의 밝기와 어둠의 대비는 실제로 해가 기울어 가는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앙상블은 모티프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다. 초기의 단순한 선율은 갈수록 다양한 음색과 다층적 화성으로 확장되다가 다시 원래 흐름으로 돌아왔지만 결코 같은 모습으로 남지 않았다. 이러한 구조는 석양이 남기는 길고 서정적인 잔향과 잘 맞물려, 듣는 이로 하여금 곡의 흐름을 따라가며 순간순간 감정 변화에 쉽게 이입하게 했다. 특히 바이올린의 미세한 떨림과 첼로의 깊은 울림은 서로 깊이 어우러져 농익은 황혼을 묘사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시각적으로 이채롭게 다가온 자리 배치 또한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무대 중앙의 현악오중주가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 배치된 현악 앙상블은 한 폭의 풍경에 둘러싸인 한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정적인 풍경에 둘러싸인 동적인 반응이랄까. 현악 앙상블이 석양이 지는 노을 풍경을 여러 색깔의 여운을 남기며 묘사하면 중앙의 현악오중주는 자신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개인적 정서를 담담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단순한 서정적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삶, 기억, 소멸에 이르기까지 석양이 담고 있는 그 모든 은유를 주제 의식으로 품고 있었다. 정적 속에 남은 현악기들의 떨림은 노을이 지고도 남을 오랜 인생의 여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레이프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영국 르네상스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가 남긴 선율을 주제로 완성된 현악 합주곡이다. 작곡가는 1904년부터 2년 동안 성공회 찬송가 편집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의 악보들을 처음 접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10년 <Three Choirs Festival>에서 연주할 신곡을 위촉받자 그는 이때 특히 영감을 주었던 탈리스의 찬송가 모음집 <어찌하여 분노하는가(Why fum’th in sight)>에 수록된 곡들의 선율을 테마로 삼아 환상곡을 완성했다. 이 환상곡에는 본래 대편성 현악 오케스트라, 9명으로 이루어진 소편성 오케스트라, 현악4중주 이렇게 3가지 편성의 악단이 등장해 다양한 레이어를 가진 음색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편성은 작곡가가 이 곡이 초연될 글로스터 대성당의 독특한 음향을 고려해 구상한 것이었다. 

 

  본 공연에서 관객은 오케스트라는 대편성 악단과 소편성 악단이 주어진 테마를 서로 메아리처럼 주고 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합주단은 물론 현악 4중주, 그리고 독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성들이 서로 소리를 교차하며 고대 대성당에서 울렸을 잔향을 상기시켰고, 그 교차하는 소리의 한 가운데에서 영국 고유의 프리지아 선법과 밀집 화음들이 엄숙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본 윌리엄스가 따온 탈리스의 주제 또한 단순한 선율의 모방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주제는 피치카토를 비롯한 다양한 음형으로 변화하여 신비롭고도 순수한 형태로 변주되었다. 은밀하게 드러나는 주선율과 반복되는 변주에서는 단순한 종교적 경건함을 넘어선 보편적 신비와 내면의 고요가 느껴졌다. 바스크스의 교향곡과 박영희의 <석양의 빛>에서처럼 이 작품 또한 작품 전반에 명상과 반추의 분위기가 가득해서, 듣는 이에게 깊은 사색과 치유의 순간을 선사했다.

 

  전반적으로 이날 공연은 다양한 시대와 작품이 한 무대에서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바스크스가 보여준 거대한 서사, 차이콥스키가 들려준 화려한 기교, 박영희의 정서적 내림과 상승, 그리고 윌리엄스의 고전 주제에 대한 현대적 재구성이 서로 다른 색채로 스펙트럼을 구성했다. 연주자들의 기술적 숙련도는 물론, 앙상블의 응집력도 탁월했다. 마치 하나의 유기적인 생물인양, 음악적 흐름은 매끄럽고도 예리하게 느껴졌으며, 관객은 이 음악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존재가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해답을 찾으라고 유도받는 기분이었다. 색채도, 스펙트럼도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모든 곡에는 지난 날을 돌아보며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라는, 똑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畵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