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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화음크리틱스 콜렉션: Maniac Discovery I] Vivo, Viva! — 생생한 기세로 살아난 연주
서주원 / 2025-12-12 / HIT : 213

화음크리틱스 콜렉션: Maniac Discovery I

화음챔버오케스트라, 박상연(지휘)

2025년 12월 3일(수) 오후 7:30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 

 

Vivo, Viva! — 생생한 기세로 살아난 연주

 

서주원

(음악비평가, 음악학박사)

 

 

매너리즘을 몰아낸 매니악의 밤

 

먼 북쪽에서 몰려온 찬바람이 갑작스레 도심을 뒤덮은 밤, 화음챔버의 공연은 매너리즘의 온기를 한순간에 쓸어내며 시작되었다. 무대는 익숙한 것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미지의 땅을 향하는 생생한 탐색의 에너지로 가득했다. 거리는 추위로 떨었지만, 공연장은 또 다른 떨림으로 채워졌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시리즈 ‘매니악 디스커버리’는 기존 연주회의 관성을 흔드는 기획이다. 이는 매너리즘이 만들어내는 관성적 반복과 정면으로 대조된다. 매너리즘은 익숙한 양식을 안전하게 재생산하며, 손에 익은 규칙 속에서 예술의 생명력을 조금씩 소진시킨다. 겉으로는 매끄럽게 완성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살아 있지도 않은’ 정적이 흐른다. 그러나 이날 공연은 그런 매끈하고 안온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났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기보다는 익숙해지지 않은 영역을 향해 기세 좋게 몸을 던지는 탐험성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정전의 중심이 아니라 그 바깥을 응시하려는 의지, 안전한 목록의 반복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전진이 이날 무대를 추동하고 있었다.

 

연주는 관성에서 벗어나 살아 움직였다. 생생함을 뜻하는 ‘vivo’의 기세는 청중의 환호 속에서 ‘viva!’로 이어졌다. vivo와 viva는 모두 ‘살다’를 뜻하는 라틴어 ‘vivere’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밤의 음악은 단순히 무난한 작품과 연주를 감상하는 자리가 아니라 예술이 본래의 생명력을 다시 기억하며 회복하는 순간에 가까웠다.

 

 

친숙한 듯, 어딘가 낯선 작품들

 

연말이면 해마다 반복되는 작품들이 있다. 화음챔버 공연이 열리던 세종문화회관의 12월 홍보 게시판에도 ‘헨델, 메시아’와 ‘베토벤9’이 어김없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은 ‘베토벤9’이라는 네 글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한 자신감이 포스터 전체에 배어 나왔다. 큰 포스터 어디에도 장르를 나타내는 ‘교향곡’이나, ‘합창’이라는 부제조차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조차 없는 익숙한 이름, 익숙한 곡목이다.

 

화음챔버의 ‘매니악 디스커버리’는 그런 안이한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날의 연주 목록은 김은성의 〈Vivo for String Orchestra〉, 모차르트의 〈피아노 사중주 사단조〉, 차이콥스키의 〈피렌체의 추억〉이었다. 2023년에 탄생한 김은성의 작품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모차르트라고 해서 무심하게 넘길 수는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자 또 다른 개성을 지닌 작곡가인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이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도 마찬가지다. 교향곡이나 협주곡, 혹은 연말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 아니라, 평소 쉽게 감상하기 어려운 실내악 〈피렌체의 추억〉이 이날의 주인공 자리에 올라섰다. 익숙한 이름들조차 이 무대에서는 다시금 ‘낯설게 보기’의 대상이 된다.

 

이 세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참신함을 드러낸다. 김은성의 〈Vivo for String Orchestra〉는 고전음악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음악 어법과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등의 음악을 인용하면서도, 이질적인 요소들을 교차시켜 독특한 음향적 대비를 만들었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의 〈피아노 4중주 사단조〉는 작곡가 안성민의 편곡을 거쳐 피아노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실내악의 밀도는 유지하면서도 때로는 피아노 협주곡처럼, 때로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이중 협주곡처럼 들리는 등 장르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귀를 신선하게 자극한다. 차이콥스키의 〈피렌체의 추억〉 역시 원래의 현악 6중주에서 현악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확장돼 보다 풍성하고 역동적인 음향을 들려준다. 이러한 작품들이 한 무대에 모일 때 청중은 신선함과 함께 낯섦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소통을 향한 길목, 아직은 부족한 자리

 

낯섦이 장벽이 될 때 해설은 이를 흥미로운 감상의 출발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날 해설은 그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비중이 적었다. 공연 전 공지에 따르면 프리렉처는 공연 시간 10분 전인 7시 20분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공연 당일에는 시작 시각이 7시 10분으로 앞당겨져 있었다. 공연장 운영과 관련한 여러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그럼에도 해설을 공연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는 의문으로 남는다. 화음은 이전에도 공연 30분 전에 약 20분간 해설을 진행하고, 10분간의 휴식 후 본 공연을 시작하는 방식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해설은 본 공연과 분리된 별도 이벤트처럼 느껴졌고, 공식 연주 전이라는 인식 속에서 관객이 자리를 찾는 동안 분위기가 쉽게 산만해지기도 했다.

 

화음이 늘 색다른 레퍼토리를 선보여온 단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해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날 해설은 불과 10분 남짓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연주 시간이 1시간 30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설을 공연 시작 시각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생소한 작품들을 중심에 둔 기획일수록, 해설은 그 연주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 

 

공연 당일, 공연에 앞서 세종미술관 전시를 함께 둘러본 필자에게는, 도슨트의 해설과 안내가 작품과 관람객을 연결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화음이 지향해 온 ‘예술을 통한 대화’라는 정체성과 실천 방식이 새삼 환기됐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미술관은 일상 속 여유로운 쉼표 같은 공간이었지만, 이제 웬만한 전시는 만원 지하철을 연상케 할 만큼 붐빈다. 이날 체감 온도가 영하 10도에 가까웠던 평일 오후임에도 전시실은 관람객으로 가득했고, 해설 시간이 되자 한 전시실을 가득 메울 만큼 인파가 몰려들었다. 도슨트를 보호하고 동선을 정리하는 가드까지 두 명이나 배치되어 있었다. 중간에 잠시 앉아 숨 돌릴 의자 하나 없는 빽빽한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은 거의 한 시간을 꼬박 서서 도슨트를 따라다녔다. 적잖이 피로가 쌓일 법한 상황임에도 줄은 줄어들 기색이 없었다. 겹겹이 둘러선 인파 탓에 도슨트와 작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 끝까지 설명에 몰입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한국 관람객들의 배움에 대한 남다른 의지와 열정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풍경을 공연장에 대입해 보면, 정작 편안히 앉아 집중할 수 있는 연주회장에서 해설의 역할과 그것을 수용하는 청중들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낮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이 지점은 앞으로 충분히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연주가 채워낸 자리

 

해설의 비중이 아쉬웠지만, 이날 화음이 보여준 음악적 성취는 그 빈자리를 상당 부분 채워 주었다. 세 작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매니악 디스커버리’라는 기획의 의미를 드러냈으며, 연주자들은 응축된 에너지로 각 작품의 고유한 생동감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 이들은 마치 모든 연주에 사활을 건 듯 몸을 사리지 않는 연주를 선보였다.

 

앞선 전시회에는 샌디에이고 미술관이 100년간 수집해온, 60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작품 중 65점이 전시되었다. 이 중 28점은 개관 이후 단 한 번도 해외로 반출된 적이 없다고 한다. 내년 미술관 100주년을 앞두고 리모델링 일정이 겹치며 드물게 서울에서 전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미술관을 찾는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 원화를 직접 보기 위함일 것이다. 아무리 완벽하게 재현했다 해도, 고야와 모네의 디지털 프린터화를 보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음악과 미술은 분명히 구별된다. 작곡가의 자필 악보가 아니더라도 연주가 가능하므로, 음악은 보다 많은 이들이 동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매체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작곡가의 의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주체는 연주자들이다.

 

“음악가들의 역할은 중대하다. 몇 세기 전의 작품이든 오늘날의 작품이든, 그들의 연주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날다 공중에서 떨어져 죽듯 연주하라.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완전히 지루해져 연주장을 떠날 것이다.’ 이 말은 연주자들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요구다. 그가 강조한 것은 바로 작품의 생명력일 것이다. 벼려진 정신과 날카로운 감각만이 둔한 정신과 무뎌진 감성을 뚫을 수 있다.”

 

이 글은 필자가 2016년 화음 연주에 대해 쓴 비평문의 일부다. 이날의 연주는 마치 이 글에서 말한 연주 정신이 실제로 구현된 듯한 경험이었다. 연주자들은 전력으로 작품에 몸을 맡김으로써 음악이 지닌 생명력을 청중에게 몸소 전달했다. 음악은 반복될 수 있지만 매번 새롭게 탄생해야 한다. 낯선 레퍼토리든 익숙한 명작이든, 결국 음악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은 연주자와 청중의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현장에서 박동하는 음악

 

첫 곡, 김은성의 <Vivo for String Orchestra>(화음프로젝트 Op.224)는 이날 연주의 핵심적 특성을 드러내는 효과적 출발점이 되었다. 제목이 의미하듯 현악 오케스트라의 경쾌한 흐름 속에서 생생한 생명력이 첫 순간부터 선명하게 살아났다. 프란츠 크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의 <피아노 사중주 사단조, 작품번호 1번>은 안성민의 편곡을 통해 피아노와 현악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되었다. 1802년에 첫 공식 출판된 이 작품은 천재 음악가 가문의 후예답게 불과 열 살 무렵에 작곡한 것이다. 노련한 음악가였던 아버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적당한 기교로 누구나 즐겁게 치고 들을 수 있는 반면, 이 작품에는 어린 작곡가의 다소 무모한 도전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해, 재기와 활력이 넘치지만 연주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해 보였다. 피아니스트는 시작부터 무자비한 난이도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날 협연자 윤철희는 음 하나하나를 또렷이 살리며 힘 있게 밀어붙였다. 현악 오케스트라도 날렵한 호흡으로 그 흐름에 밀착하며 합류했다. 서정적 2악장은 신선한 감수성과 예상치 못한 깊이를 지녀, 다시 듣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 곡은 탄탄한 연주력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연주와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다. 난도와 매력을 함께 지닌 이 작품은 ‘매니악 디스커버리’의 취지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현악 6중주 편성이 아닌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듣는 차이콥스키의 <피렌체의 추억, 작품번호 70>은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청중을 극적 흐름의 한복판으로 단숨에 끌어들였다. 이날 공연의 해설과 프로그램 노트를 맡은 음악칼럼니스트 송주호는 프로그램 노트에서 1악장에 대해 차이콥스키가 “상당히 활기 있게” 연주해야 한다고 명시했다는 점을 짚었다. 마지막 4악장이 춤곡의 역동적 성격으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은, 연주자들이 작품 속에 응축된 삶의 환희를 드라마틱하게 폭발시켰다. 시종 생기로 가득했던 이날의 프로그램은 이 작품에서 가장 밀도 높은 순간을 맞이했다. 연주자들이 음악적 전율과 고양된 에너지를 온몸으로 통과시키고 있다는 감각은 연주 전반에 선명히 각인돼 있었다. 지휘자는 물론, 악장과 각 파트의 수석들까지 주도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음악적 흐름을 견인해 전체 연주에 강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원곡이 현악 6중주였던 만큼 각 파트 수석이 솔로로 나서는 대목들이 있었고 이들은 솔리스트로서의 역량도 분명히 드러내며 뛰어난 연주력을 발휘했다. 

 

 

활력의 절정, 정제의 과제

 

이날 연주는 시종 활력과 긴장감으로 충만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았다. 맹렬하리만큼 거침없는 연주는 단원들의 열정을 분명히 드러냈으나, 한편으로는 다소 날것의 결이 거칠게 드러나기도 했다. 각각의 개성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야성적 에너지—다듬어지지 않은 생동감과 강렬한 울림—은 물론 이 연주의 가장 큰 강점이었지만, 그 압도적인 추진력에 비해 전체 음향은 세심하게 조율된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거침없는 돌진과 정제된 음향은 애초에 조화시키기 어려운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목표도 아니다. 대단한 활력과 새로운 도약을 보여준 연주였지만, 결코 이번 연주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탐험과 도전의 정신, 바로 ‘매니악 디스커버리’는 앞으로의 모든 연주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장막을 걷어내고 생동하는 음악 

 

흔히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한다. 절제한다고 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벅차오르는 마음이 그렇고 터져 나오는 기침이 그렇듯, 마음의 기세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연을 감상한 후 종종 궁금해진다. 폭발적 사랑과 죽을 듯한 고통, 내면의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담긴 작품을 열띠게 연주한 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무표정하게 일어설 때다. 검은색 옷차림이 음악에만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듯, 연주자들의 무표정한 얼굴 역시 시선을 작곡가에게만 집중하라는 의미일까? 마치 이들에게는 개인의 감정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라도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토록 열렬한 연주 직후에 모든 표정을 지워버리는 순간,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단절감이 생긴다. 예술이 감동을 타고 막 살아 움직이려는 찰나, 순식간에 한 겹의 장막이 쳐진다. 

그러나 이날 화음챔버의 연주자들은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냈다. 연주가 끝나자 얼굴에 차오른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그 열기는 표정과 몸짓을 타고 객석으로 퍼졌다. 무대의 환희에 관객도 환호로 응답했다. 단원들은 발을 구르며 기뻐했고, 청중은 박수로 기쁨에 동참했다. 오래 이어진 박수는 형식적인 앙코르 요청—내심 지루함을 견디며 의례적으로 치는 박수—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연주는 매너리즘에 빠진 박수를 부르기 마련이다. 연주와 박수는 서로의 기운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날 서로를 환하게 비추던 순간, 살아 있는 음악 속에서 연주자와 청중은 같은 생동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니악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첫 연주회에서 연주의 살아 있는 힘(vivo)과 청중의 찬미(viva!)가 하나로 결합하며, 예술은 다시 한 번 용솟음쳤다. 음악이 본래 지닌 생명력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확인되고 회복되는 시간이었다. ‘viva’에는 ‘브라보’라는 감탄뿐 아니라, 생명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까지 담겨 있다. 부디 이 열기와 기세가 시리즈 끝까지 맥박치기를 바란다. [畵音]​